지구 재난에서 살아남기
비운의 천재 용호대사 정북창 본문
정북창(鄭北窓) 같은 재주로도 ‘입산 3일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 하였느니라. (도전 2편 34장 3절)
이윽고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용호대사(龍虎大師)의 기운을 공우에게 붙여 보았더니 그 기운이 적도다.” 하시니라. (도전 4편 88장 12절)
입산 3일 만에 천하사를 알다
소성 우리나라 미륵신앙의 종조인 진표대성사께서 건립한 미륵 제3도량 발연사가 있는 금강산. 소슬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계곡을 진동하는 큰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휘~휘~휘~. 발연사에 있던 이들은 처음에는 피리소리인가 싶어 깊게 심취해 있다가 순간, 용의 울음소리인가 여길 정도로 큰 소리에 순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소리를 찾다가 금강산 비로봉 아래 한 사내가 큰 휘파람 소리를 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휘파람 불기, 즉 소법嘯法은 선도수행에서 깊은 내단의 공력을 바탕으로 발휘된다고 한다. 그는 조선 단학의 비조라고 일컫는 정렴鄭磏이었다. 부친인 정순붕鄭順朋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금강산에 놀러가서 낸 소성嘯聲에 얽힌 일화이다.
북창 정렴은 조선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 대를 살았다. 자字는 사결士潔이며 북창北窓은 그의 별호이다. 그의 시조 정보천은 고려 때 벼슬하여 호부상서를 지냈고, 정희貞僖라는 시호를 받았다. 중중 원년인 1506년 병인 3월 갑신일에 6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온양으로 예종과 성종 연간에 걸쳐 증조부인 충기忠基는 승문원 교리를 지냈고, 조부는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을 지낸 탁鐸으로 2대를 벼슬하면서 가문이 번성하여졌다.
탁이 순붕을 낳으니 바로 북창의 부친이다. 정순붕(1484~1548)은 명종 때 있었던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에 여러 선비를 죽여 우의정까지 출세했던 ‘을사 삼간(三奸)’ 중 한 명이고, 모친은 태종의 큰아들인 양녕대군의 손자인 봉양부정鳳陽副正 이종남李終南의 여식이다.
배우지 않고 통달 북창은 천지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 신령神靈하여 곧바로 말을 할 줄 알았다. 어릴 적부터 마음을 가다듬어 신神에 통할 줄 알았는데, 어렸을 때 산사에서 선가禪家의 육통법을 시험하려고 3일 동안 마음을 가라앉혀 사물을 바라보아, 가까이는 동리 집안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멀리는 산 너머 백리 밖의 일까지도 통달하였다고 한다.
자질은 빼어났고 욕심이 적어 한 점의 티끌도 없이 맑았으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 한두 번 글을 읽으면 모두 외워, 자라서는 하늘 아래 있는 온갖 학문에 통하지 않음이 없어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 율려律呂 산수算數 한어漢語 및 외국어를 배우지 않고도 능통했다. 스승 없이 혼자 터득하여 깨쳤다고 전해진다. [일화참조]
조정 출사 이무렵 부친 정순붕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전주 부윤으로 좌천되었다가 면직되고, 이듬해인 1521년에는 ‘종의 얼굴을 지어가면서 아첨하여 섬겼다’(奴顔諂事)고 하여 관작까지 삭탈당한다.[출처 조선왕조실록]
이후 1537년 부친이 복직될 때까지 북창은 여러 학문에 통달해 있었다. 이후 북창은 32세에 소과인 사마시※에 급제하였다. 부모의 강압적 권유에 따른 것으로 이후 과거에는 미련을 버렸다. 이에 대해 자신의 유훈에 이렇게 적고 있다.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과 진사進士를 선발하는 과거시험. 생원진사시라고도 함)
“세상에 처함에는 겸손하고 물러남에 힘써서, 고관高官 벼슬에 나가지 말고 낮은 지위에 머물 것이다. 혼인은 고귀한 가문에 의탁하지 말 것이며, 때가 화和하면 벼슬을 하되, 세상이 어그러지면 임야林野에 물러가 힘써 땅을 갈아 자급自給할 것이다.” -북창 정렴의 「온성세고」 유훈 中에서
다만 음률에 밝고 천문과 의약에도 조예가 깊어 조정에서는 단계를 뛰어넘어 종6품인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 겸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 교수를 제수하였다. 의술이 뛰어나고 약리에 정통했던 북창은 중종中宗과 인종仁宗이 위독할 때 명의名醫라고 천거했을 정도로 뛰어난 의술로 명망이 높았다. 이런 그가 항상 했던 말은 이러했다.
“의원이란 의논한다는 것이니, 마땅히 음양陰陽과 한열寒熱을 살펴 증상에 맞게 약을 투여하면 거의 다 완전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의 의원들은 진부한 서적에 국한되고 한 가지 방술에 집착하여 변통變通할 줄을 모르고 증상의 반대로 약을 쓰고 있으니, 어떻게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인종의 신뢰 비상한 재주를 지닌 그를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병풍 위에 영의정 갖바치, 좌의정 서경덕, 우의정 정북창이라 써놓고 이미 크게 쓰기 위해 마음 속으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으로 성군이라 칭송받던 인종은 즉위 9개월 만에 급서하고 만다.※ 경천위지의 재주를 지녔던 정북창은 재주를 펼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야사에는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히려는 문정왕후가 독살을 사주했다는 설이 있다)
그후 포천현감抱川縣監이 되어서는 문을 닫고 고상하게 누워 지냈으나 백성들은 편안하게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산속에 은거 임기가 차기 전 관직에서 물러나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과천의 청계산淸溪山과 양주의 괘라리掛蘿里에 주로 은둔하며 지냈다.
애초에 관직에 뜻이 없었던 그가 이렇게 속세를 등지게 된 것은 부친 정순붕이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적극 관여해 무고한 사람들을 해하려 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북창은 부친께 그 일이 그릇된 것임을 누차 고告하고 적극 만류해 보았으나 듣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크게 미움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부친과 아우 현이 일을 그르칠 것을 우려한 나머지 그를 제거하려 했다. 이를 미리 간파하고 몸을 피한 북창은 이후 세상과의 인연을 끊은 채 산 속에 은거하였다.
적악가의 굴레를 안고 한 마리 학이 되다
정북창의 욕심 없는 처세와 달리, 부친인 정순붕은 삭탈관작된 17년간 고초를 겪으며 출세에 대한 야망을 갖게 된다. 1545년 명종 1년인 을사년. 북창의 부친 정순붕과 동생 정현은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가 되어, 인종의 외척인 윤임 일파와 당시 사림에 명망 있던 인물들을 모함하여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한국기인전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한국의 신선전이라 할 수 있는 『화헌파수록華軒罷睡錄』※에 내려온다. (※우리나라 도사나 신선의 일화나 명현들의 일화가 곁들여진 저자와 연대를 알 수 없는 책이다. 한국기인전이라는 이름으로 1990년 출판됨)
“정북창의 형제가 모두 명현名賢이 되었으나 홀로 막내 현礥만이 매우 요사스럽고 악해서 그 아비를 을사사화를 일으킨 흉악한 당으로 인도하게 했다. 이것은 모두가 현의 소위다. 북창이 그 아버지에게 몰래 고하기를, “우리 집을 망쳐 놓을 놈은 저 현입니다. 저 현은 여우의 요정狐精입니다. 아버님께서 만약에 제 말을 믿지 못하신다면 눈앞에서 시험해 보이겠습니다.” 라고 하고서, 현을 불러 앞에다 앉혀 놓고, 북창이 그의 등 뒤 몇 치 밖에서 손으로 당기며 현을 일어나게 했으나 현이 일어나지를 못했다.
아버지 순붕이 이상하게 여겨서 그 까닭을 물으니 북창이 말하기를 “제가 여우의 꼬리를 잡았기 때문에 일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님께서 양찰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나 순붕은 오히려 그리 여기지 않고 한결같이 현의 말만 들으면서 도리어 북창을 의심했다. 이에 북창은 자기 힘으로는 아버지가 동생 현에게 빠진 것을 구제할 수 없다고 여겨서 과천으로 물러나서 살았다고 한다.”
용주선생유고 이때 북창은 부친과 동생이 불의한 일로 출세하려는 의도를 알고는 이를 만류하고자 눈물로써 부친께 간諫한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동생(현)이 몽둥이를 들고 형 북창을 패서 죽이고자 했다. 이 일에 대해 대제학 조경趙絅(1586~1669)의 문집인 『용주선생유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북창의 대효로도 부친과 동생이 남을 무함誣陷하여 출세하려는 사악한 짓을 막을 수 없었다. … 이는 ‘순舜임금의 고사古事’와도 비슷하나 실제는 북창이 순임금보다 더 고통과 어려움이 많았다.”
북창이라는 호 을사사화의 다음 해 북창은 양주 괘라리, 경기도 광주 청계사(지금의 과천 청계산), 과천 관악산 등지로 은둔하였다. 출세욕에 빠져 무고한 선비들을 죽이는 부친과의 관계에서 본래부터 병약한 편이었던 북창은 울분에 가득 차게 되었고, 동생이 형을 죽이려는 무도한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산속에 살면서 한양으로는 머리도 돌리기 싫어 드나드는 대문과 방안의 창문을 모두 북쪽으로 낸 채 살았다. 북창北窓※이란 별호도 이때 생겼다. (※북창의 묘비명에는 복희伏羲시대 이전 사람이라는 뜻을 취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선도 수련에 전념 평소 신체가 야위는 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항상 그 병을 스스로 살펴보아 노복으로 하여금 조석으로 약제를 달리 쓰도록 하였는데, 아침에는 반드시 입을 다물고 바른 자세로 앉아서 약을 마시고 해가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비로소 입을 열어 기를 내뿜었고, 밤에도 역시 단정히 앉아 새벽이 되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이는 수련修鍊을 부지런히 한 것뿐만이 아니라 고명高明에 마음을 완미하고 의리를 탐색하는 것에 있어서도 모습이 구름 속의 학이나 바람 속의 매미와 같았다는 것을 정말로 알 수 있다.
또 이야기를 잘하여 어진 사람이나 불초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다 공의 덕을 승복하고 공의 기풍을 좋아하였다. 풍채는 구름을 탄 학과 같았고 천성적으로 육식을 즐기지 않았으나 술을 좋아하여 서너 말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만년晩年에는 신병身病으로 인해 한잔의 술도 마시지 않으며 조심하였다고 한다.
스스로를 산속의 감옥 같은 곳에 가두고 선도 수련에 전념하던 어느 날, 자만시自挽詩※ 한 수를 남기고 가만히 앉은 채로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 이때가 가정嘉靖 기유 명종 4년 1549년으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당시 주위 사람들은 그가 구름을 타고 승천했다고 하고, 시해선尸解仙을 했다고들 했다.
※ 스스로를 애도하는 시
자만自挽
一生讀破萬卷書 일생 동안 만 권의 책을 독파하고
一日飮盡千鍾酒. 하루에 천 잔의 술을 마셨네!
高談伏羲以上事, 태호 복희씨 이전 일에는 고고하게 담론하나
俗說從來不掛口. 속설은 아예 입에도 담지 않았네!
顔回三十稱亞聖, 공자의 제자 안회는 서른을 살아서 아성이라 불렀는데
先生之壽何其久. 자네의 수는 어찌 그렇게도 긴고.
이에 북창의 아우 정작鄭碏(1533~1603, 북창보다 27세 연하)이 지은 만시挽詩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修文繼亞聖 문을 닦아 아성을 이었으나
厭世化胎仙 염세 끝에 태선으로 화했네!
寂寞三生話 적막하구나! 삼생의 이야기여
수명壽命을 기부 의술과 약리에 밝았고 무병장수를 추구하는 선도에 정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도교 수련서인 『용호비결龍虎泌訣』을 저술한 그가 의외로 수명이 짧았던 사실이 의아할 수가 있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북창은 스스로 타고난 수명이 80세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번은 그의 절친한 친구가 과거에 낙방한 후 찾아와 어려운 형편에 자신의 명命도 짧아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함을 한탄하며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못 이긴 북창은 어떤 노인(수명을 관장하는 별壽星인 사명성군司命星君)을 찾아가 끝까지 매달리라고 일러주었다.
이로 인해 북창은 자신의 수명 중 30년을 그 친구에게 옮겨줘 버렸다. 또 한번은 친구의 부친이 그를 찾아와 중병에 걸려 위독한 자식을 구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미 그 친구의 천명이 다했음을 알았지만, 아무 날 저녁 아무 산에 올라가면 산 위에서 푸른 도포와 노란 도포를 입은 두 노인(남두신군, 북두신군)이 바둑을 두고 놀고 있을 테니, 바둑이 끝날 무렵에 술과 안주를 권하여 사연을 이야기하면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북창의 수명 10년이 다시 친구에게 옮겨졌다고 한다.
북창의 묘소 북창의 묘소는 살았을 때 집안의 장지葬地로 친히 잡아두었던 경기도 양주 사정산沙井山(지금의 양주시 산북동) 산록의 온양 정씨 선영先塋 아래 남향으로 묻혀 있다. 부인은 진주晉州의 갑족甲族인 생원 유인걸의 딸이었고, 지복之復, 지임之臨의 두 아들이 있었으나 직손은 없어, 조카 지승之升의 아들 시時가 가계를 잇게 되었다. 이곳에는 6대손이 적고, 8대손이 쓴 비석이 있다.
여러 사람을 죽이는 불의를 저지르며 벼슬에 올랐던 그의 부친은 죽은 뒤인 선조 11년 1578년 모든 벼슬이 추탈되고 공훈도 삭제된다.
조선 도교의 도맥을 계승하다
타고난 재능이 뛰어났던 북창은 유불선 삼교의 근본 뜻까지 꿰뚫어 그 깊은 이치까지 터득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내용들이었다. 이에 대해 유교로는 송유宋儒의 교법을 치가의 지침으로 삼고, 불교로는 선禪의 요리要理를 심득하였고, 선가로는 단학의 오의를 깊이 깨달아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천문지리 같은 잡학에 관심이 많았고, 은둔시절에는 도학 수학 역학 등의 신선수련법에 관심을 가졌는데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터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무외韓無畏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의하면 북창은 매월당 김시습에서 승려 대주大珠로 이어진 조선 도교의 도맥을 계승했다고 되어 있다.
온양 정鄭씨의 배경 하지만 북창이 선도수련에 마음에 두고 정진한 것은 온양 정씨의 가학家學이라는 배경과 교유관계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북창의 백부인 정수붕鄭壽朋(성종 갑오년1474~중종 갑오년1534)의 아들인 사촌형 계헌桂軒 정초鄭礎(1493~1539)는 자는 정수靜叟로 중종 17년(15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533년에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이 교리에 이르렀으나 병을 핑계 삼아 사직하고 두문불출하면서 선도를 수련하여 이인이라 칭했다. 하늘로부터 신선이 그의 방으로 내려와서 시를 선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렴의 동생인 고옥古玉 정작鄭碏(1533~1603)은 자를 군경君敬이라 하였고, 성질이 맑고 깨끗하여 도가서 읽기를 좋아했으며 일찍부터 형으로부터 단학을 배웠다고 한다. 후에는 형의 친구이자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였던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1513~1592)를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수년 동안 수련하기도 했다. 중년에 상처한 후 35년 동안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나 술을 좋아하였으며, 시에 능하였고 의약에도 조예가 깊었다.
1596년(선조 29년)에 선조의 명으로 『동의보감東醫寶鑑』 편찬 작업 때 원로로서 참여하였다. 허준은 그의 아래에 있었다. 도가와 의학의 조예가 깊은 그는 『동의보감』의 ‘정기신精氣神’을 중심으로 한 이론체계의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부친이 을사사화에 가담하자 방랑생활을 하였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고경명(1533~1592)과 벗하고 격암 남사고(?~1564~?, 자는 경초景初)를 선배로 모셨다. 선조 갑진 1604년에 하찮은 병으로 71세에 앉은 자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다.
일가 삼선三仙으로 불림 북창은 선도仙道에 함께 몰두하며 뜻이 통했던 동생 정작과 사촌형 정초 등과 일가一家 삼선三仙으로 불렸다.
역학의 대가 박지화 그리고 불승佛僧들과 만나서 산수를 즐기며, 유불선에 대한 도담道談을 나누면서 삼교三敎에 두루 통했다고 한다. 이들과 북창은 이심전심으로 마음이 통했고, 상대방의 사상을 인정해 주었던 진정한 도반道伴들이었다.
북창은 선도仙道에 밝았던 도인 유학자 화담花潭 서경덕(1489~1546)을 존경하며 스승처럼 여겼다. 화담은 어릴 적 천자문을 공부할 때, ‘하늘 천(天)’자에 문득 크게 깨우치고는 ‘천(天)’ 자 외에는 더 이상 다른 글자를 읽지 않았다고 한다. 서경덕은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에 나오는 ‘우주일년의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선후천 시간대’의 이치를 깨우쳤다고 전해질 만큼 수리학數理學과 역학易學에 아주 밝았던 도인이었다.
북창은 시도 아주 빼어났는데, 시 평론가 홍만종(1643~1725)은 ‘정작, 박지화, 정북창 중에 북창의 시가 가장 뛰어났고 당시唐詩에 필적할 만하다’고 평했다.
빼어난 재주를 지녔던 북창! 조정에 출사하여 그 포부와 재주를 펼쳤다면 어떠했을까? 아버지의 적악積惡으로 인한 마음의 병으로 오래 살지 못했고, 다만 조선 단학의 비조鼻祖로 『용호비결』과 『궁을가』와 몇 편의 시가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를 알아보았던 군주는 일찍 세상을 떴고, 재주를 펴볼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적악가의 자손으로서,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 모든 게 천명이라고 하겠다. (객원기자 이해영)
■[일화] 정북창의 재주
허목(許穆, 1595~1682)이 저술한 『기언(記言)』과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도교사』에는 정북창의 재주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북창이 14살 때 명나라로 사신使臣을 가는 아버지를 따라 제자군관弟子軍官※이 되어 북경으로 갔다. 사행을 가는 도중(명나라 정덕제 무종 년간)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중국말을 하였다. (※외국에 사신으로 갈 때 그 사신의 아우나 아들 등 가족이 그 사신을 호위하여 가는 군관)
북창은 북경北京 자금성 내 황제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던 봉천전奉天殿 뜰에서 한 도사를 만나게 된다. 중국 도사가 “그대의 나라 조선에도 우리 같은 사람(도사)이 있는가?” 하고 물었다. 북창이 그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에는 삼신산三神山이 있어 대낮에도 신선神仙이 승천하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도사가 귀할 게 뭐 있겠습니까?” 이에 도사가 몹시 놀라며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니 북창이 『황정경』, 『참동계』, 『도덕경』, 『음부경』 등의 도교 경전을 거론하면서 신선이 되는 법을 상세히 설파하니, 그 도사는 부끄러워하며 슬며시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때 유구국(琉球國: 현재의 오키나와) 사신이 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이인異人이 있어서 자기 나라에 있을 때 미리 역수易數를 추산해 보고 중국에 들어가면 반드시 진인眞人을 만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북경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나라 사신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두루 찾아다녔으나 진인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북창을 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큰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진인을 만나지 못하더니 여기서 선생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하면서 『주역』을 가르쳐주기를 간청했다. 이에 북창은 쾌히 승낙하고 즉석에서 유구어로 그에게 주역을 가르쳐주었다. 이 소문을 듣고 여러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찾아드는데 그들의 질문에 그 나라 말로 척척 응대하니 사람들은 모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북창을 ‘천인(天人)’임에 틀림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북창에게 물었다. “세상에는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말이란 결국 새나 짐승의 소리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알아듣는 것은 혹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까?” 이에 북창은 “나는 듣고 나서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었소.” 라고 대답하였다.
천지변국의 도비道秘, 궁을가
북창의 또 다른 저서로는 궁을가弓乙歌가 있다. 궁을가는 증산상제님께서 직접 인용하시고 확인해주신 비결가사이다. (도전 2편 94장 8절 등)
궁을가는 앞으로 인류에게 닥칠 천지대변국의 개벽시절에 살길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궁을弓乙을 찾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궁을은 우리나라에 있는 여러 예언서나 비결서에 꼭 등장하지만 알 수도 없고 풀기도 어려운 도비道秘로, 지금까지 가장 난해한 수수께끼를 간직한 말이 되어 왔다.
전지의 조화정신, 궁을 본래 궁을은 풍수지리학에서 나온 용어로 산의 용맥이 굽이치는 형상인 궁弓과 물이 흐르는 형상을 상징하는 을乙을 상징하는 음양기운을 말한다. 그래서 이 궁을을 산과 물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모든 비결서마다 한결같이 산과 물에서는 찾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궁을은 천지일월의 무궁한 조화정신을 뜻한다. 즉 궁은 양이고 을은 음으로 궁을의 존재모습은 천궁지을天弓地乙이라 하고 하늘기운인 궁의 음양을 궁궁弓弓, 땅기운인 을의 음양을 을을乙乙이라 하여 궁궁을을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우리 국기인 태극기의 4괘상인 건곤감리의 조화정신이고 천지일월의 무궁한 음양운동을 상징하는 말이다.
궁을가는 이러한 궁궁을을이 인신人神으로 강세하며 도통군자로 출세하게 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즉 궁을은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격암 남사고 역시 궁을은 천하창생을 구제하는 사람 중의 사람(眞人), 하늘과 땅을 임의로 조화하는 해인을 가지고 권세를 용사하는 신인(神人)이라고 밝히고 있다.
궁을가에는 ‘궁궁을을성도’弓弓乙乙成道라는 말이 자주 후렴구로 반복되고 있다. 궁을가는 동학도들 사이에 크게 유행하였다. 최수운 대신사가 상제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을 때부터 궁을을 찾았고, 현재 천도교를 상징하는 표지도 역시 궁을이다. 또한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은 궁을부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인류구원의 소식 미래의 일을 훤히 예견했던 정북창은 궁을가를 통해 장차 우리나라에 인류구원의 성천자聖天子가 출세하는 소식을 우주원리 차원에서 노래하였고 그 변국과정과 구원에 대한 열쇠를 후세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궁을가에 나오는 일부 내용이다.
낙반사유 뉘알소냐 인의예지 적선이라
천지정배 다시되니 …
애고애고 저백성아 간단말이 어인일고
고국본토 다버리고 어느강산 가려는가 …
부모처자 다버리고 길지찾는 저백성아
자고창생 피난하여 기만명이 살았던가 …
저기가는 저백성아 궁을가를 웃지말소
사궁을이 성도할새 일인지화 극난이라 …
남천북천 어인 일고 …
조선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가 또있구나
사명당이 갱생하니 승평시대 불원이요 …
이재궁궁 이것이라 늘부르면 용화로다 …
선악을 구별하는 태극궁을 신명이라
물욕지심 다버리고 궁궁을을 놀아보자 …
길지찾아 가지말고 금일부로 갱심하소 …
춘아춘아 태평춘아 사시안정 태평춘아 …
궁을궁을 성도로다 …
■[도훈] 적악가에서 태어난 정북창
사람은 때를 잘 만나야 한다. 인간이란 여러 억만년 만에 한 번씩 태어나는 존재다. 헌데 때를 잘못 만나 태어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또 사람은 적덕가의 가정에서 태어나야지, 적악가의 가정에서 태어나면 제 아무리 영웅, 열사의 경천위지하는 재주를 가졌더라도 헛세상 살다 가는 것이다. 상제님도 “정북창 같은 재주로도 입산 삼일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는 말씀을 하셨다. 정북창이 그렇게 잘난 사람이다.
헌데 정북창의 아버지가 천하의 적악가다. 살인을 많이 했다. 내가 뭐 남의 조상 단점을 새삼스레 애기하고 싶진 않지만, 역사적으로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니까 하는 소리다. 그렇게 자기 아버지가 적악을 많이 해서, 정북창이 그 좋은 재주를 써먹지 못했다. 여기 아산 온양읍이 바로 정북창의 고향이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는가?
애경상문哀慶喪問이라고 하면 잘 알 것이다. 초상이 났다든지, 혹은 혼대사가 있을 때, 부락사람들이 전부 다 뭉치지 않는가, 헌데 그런 날은 누구보다도 정북창이 제일 먼저 가서 떡 하니 자리를 정하고 앉는다. 집에 돌아갈 때도 동네 사람들이 다 간 다음에야 자리를 뜬다. 왜 그랬느냐? 자기가 없으면, 사람들이 자기 아버지 욕을 한단 말이다. 그 아무개라는 천하의 고얀 놈, 누구누구를 음해해서 죽였다고, 그렇게 자기 아버지 험담을 한다. 그러니까 그 험담을 막기 위해서, 아들이 거기 가서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다.
아니 정북창이 잘난 사람인데, 그가 떡 하니 좌정하고 있으면 누가 감히 그 애비 욕을 하겠는가. 애비는 못 돼먹었을지언정, 아들인 정북창은 그런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자기 아버지 욕을 보이지 않기 위해, 사람들 많이 모인 곳에 항상 제일 먼저 가고 제일 늦게 자리를 뜨는 게 아예 습관이 됐다. 그러니 그런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이 무엇을 했겠나? 평생 자기 아버지 뒤치다꺼리나 하다가 가고 말았다.
-태상종도사님 어록, 새시대 새진리 3권, 277쪽~279쪽 발췌 수록
■[답사] 북창의 묘소를 찾아서
경기도 양주시 주내면 산북동 90번지. 찾아가기 그렇게 만만한 곳은 아니었다. 북창 묘소는 후손의 집을 거쳐 산길을 걸어 10여 분은 올라가야 한다. 정조 때 명신名臣 정민시鄭民始를 비롯해서 온양 정씨의 여러 인물들이 함께 잠들어 있는데, 북창은 아버지 묘소와 같은 곳에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어서 그의 묘비에는 탄환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다. 유불선 삼교에 회통했던 그였기에 지금도 그를 흠모하는 이들과 연구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묘소 앞쪽으로는 불국산(470m, 불곡산이라고 하는 양주의 진산)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죽은 지 46년이 지난 1595년 1월 8일, 선조와 이항복, 정경세 등이 별전別殿에서 『주역』‘건괘(乾卦)’를 강론한 자리에서 정경세가 “정렴은 타심통지술他心通之術(타인의 마음을 읽는 도술)을 터득했으며, 의술과 점복에 뛰어난 인물이었다”라고 거론하였고 1601년 8월 18일 궁중별전에서 『주역』을 강론하다가 ‘수학에 정통한 인물’(여기서 수학은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와 같은 수리 역학이다)로 화제가 미치자 “우리나라에는 화담花潭 이후에 정염이란 자가 수학이 서경덕에게 뒤지지 않아 미래의 일을 알았다고 합니다”고 거론할 정도로 북창의 비범한 재주는 계속해서 언급될 정도였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조선의 선도
우리나라의 선도는 그 역사가 오래되고 많은 도인들이 존재했다. 환국 배달 단군조선 북부여 고구려 대진국의 신교시절에는 유불선 삼교를 두루 닦은 도인들이 많았다.
대표적 인물로 환인 환웅 단군 해모수 을파소 을지문덕 옥룡자(도선국사) 최치원 김가기 강감찬 최풍헌 허미수 전우치 등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듯이 중국으로부터 우리에게 유입이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중국 도가사상의 뿌리는 우리였다.
동방의 조종 동방 선파의 조종은 환인이라고 한 『청학집』의 기록과 『환단고기』의 내용을 비교해 보면 선가, 도교, 수련의 종주宗主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 도교의 유명한 경전인 갈홍의 『포박자抱朴子』에는 “옛날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 땅에 와서,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을 만나 『삼황내문』을 받았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바, 이는 중국 도가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 황제가 우리 청구 땅에 와서 선도수련법을 배워갔다는 증거이다. 또한 중국 선도수련서의 최고 경전인 『참동계參同契』가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주역참동계를 지은 위백양은 장백산에서 노닐면서 우연히 진인眞人을 만나서, 수은과 납의 원리와 용과 호랑이의 기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마침내 18장의 『참동계』를 지어 대도를 논했다”는 글이 송나라 도사 증조曾慥가 소흥(紹興: 남송 고종의 연호, 1131~1162) 연간에 역대 도교 수련방법을 모아 편찬한 『도추(道樞)』에 전해온다. 이렇게 볼 때 정기신精氣神을 닦는 수련법인 선도(단학)의 근원은 우리 민족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선도의 기록 우리나라의 선도에 대한 책은 원래 많지 않았다. 고려시대 이전의 서적으로는 『환단고기』 정도이고 그 이외에는 파편화되어 있으며, 조선시대에 와서 그런대로 전승된 것들이 이능화의 『조선도교사』나 한무외의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등이 내려올 뿐이다.
중국 후한 때 쓰촨성 등지에서 형성된, 현재까지도 그 후신이 대만에 남아 있는 오두미도五斗米道가 고구려 때 들어왔다는 게 중국 도교의 전래 기록이다. 신라는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仙挑聖母의 이야기(※북부여 황실의 후손으로 그 흔적이 경주와 지리산 노고단에서 찾아볼 수 있다)나 화랑 네 명을 사선四仙이라 부르며 신선처럼 대우했던 일, 그 외에도 호공, 물계자, 우륵 등의 인물과 관련된 설화 등이 남아 있다.
또한 『해동전도록』에는 최승우(신라 말기 학자), 김가기(840~856, 신라 문성왕때 도사), 승 자혜(의상대사, 625~702)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 중 김가기에 대한 이야기는 중국의 『열선전列仙傳』에 그 전기가 나와 있다. 여기에 최치원은 최승우의 구결口訣을 전수받았고 중국 도교와 관련된 기록이 있으며, 신라에 와서는 가야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 선도의 인물들 고려시대에는 팔관회를 비롯해 신교문화가 그런대로 살아 있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는 광해군 때 득양자得陽子 한무외韓無畏(1517정축생~1610경술년에 세거世去, 해동전도록 내용에 대해서는 택당 이식李植1584~1647이 고증하여 택당집에 실었다)가 1610년 10월 24일에 해동전도록을 지어 우리의 도맥을 그런대로 전하고 있다.
이중 의미있는 인물들을 보면 조선조에 와서 거의 끊어질 뻔했던 도가의 맥脈이 김시습金時習에 의해 다시 계승된다. 매월당 김시습은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분개하여 세상을 등졌던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뛰어난 문학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의 진면모는 오히려 ‘도인道人’과‘생불生佛’에 가깝다. 이율곡이 쓴 『김시습전』에 의하면, 김시습이 죽은 지 3년 후 절 옆에 묻힌 그의 시신 관뚜껑을 열어보고 불승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시신이 썩지 않았고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생불 같았기 때문이라 한다.
매월당 김시습을 시조로 조선의 선도仙道는 ‘김시습→정희량鄭希良(옥함기내단지요玉函記內丹之要를 전수받음)→대주大珠(승려로 내단內丹을 정희량으로부터 전수받음)→정북창, 정작, 박지화’으로 이어지는데, 북창은 조선시대 선도에서 ‘단학의 중시조中始祖’ 또는 ‘비조鼻祖’로 평가받고 있다. 즉 『해동전도록』에 의하면 북창은 최치원崔致遠으로부터 이어지는 내단학內丹學을 조선에 들여와 크게 성취시킨 인물이다. 북창은 유교 생활원리를 중시하면서 불교와 선도를 함께 닦았다. 선배인 화담 서경덕을 존경하였는데, 화담 역시 단학을 전수받은 인물이다. 화담에서 시작하는 조선의 도맥은 토정 이지함―이서구―이운규―김일부로 이어져 김일부의 『정역』으로 그 완성을 보았다. 또한 도인으로서 수암守庵 박지화朴枝華와 친하게 사귀었는데, 박지화는 당시 도계의 저명한 인물로 후일 수선水仙으로 추앙받았다. 그 외에도 김시습―홍유손洪裕孫―밀양과부 박씨(묘관妙觀으로 개명)―장세미張世美―강귀천姜貴千―장도관張道觀으로 이어지는 천둔검법天遁劍法, 연마진결煉魔眞訣 전수의 맥이 있는데, 이 모두 우리 선도 도맥에 있어서 주요 인맥들이다.
■[소설] 『임꺽정』 속 정북창
처음에 정순붕이 이기, 윤원형 등과 자주 상종하기 시작할 때, 그의 맏아들 정렴은 포천현감으로 있었는데 근친覲親하러 올라와서 집에서 묵는 동안에 이것을 알고 밤저녁 사람 없는 틈을 타서 이기, 윤원형 같은 인물과 상종하지 말라고 간하였다. 정렴은 총명이 과인할 뿐 아니라 인품人品이 절등한 까닭에 아들일망정 꺼리고 어려워하는 터이라….
정렴과 정작이는 연치가 삼십년 가까이 틀리어서 형제간이라도 부자간과 다름이 없었으나, 정렴이가 이 아우를 특별히 귀여워하여 글을 가르쳐줄 뿐이 아니라 간간이 의약 묘리도 일러주고 선가仙家의 연단鍊丹하는 방법도 말하여주는 까닭으로 데리고 앉으면 해 가는 줄을 모르는 터이라.
-벽초 홍명희, 임꺽정3, 양반편 101쪽과 104~105쪽 발췌 수록
한국최초의 도가서, 용호비결
[용호비결 그림] 북창 정렴은 조선시대 도가 내단內丹 사상, 즉 단학丹學의 비조鼻祖로 알려져 있다. 매월당 김시습, 토정 이지함과 함께 조선 3대 기인으로 불린다.
용호비결의 다른 이름, 북창결 성리학 이외의 모든 학문이 잡학으로 취급되어 금기시되던 당시 북창은 산속에 은거하여 도를 닦고 조선최초의 도학 서적인 『용호비결龍虎秘訣』을 저술하였다. 용호비결은 일명 북창결이라고 하며 이로 해서 북창을 용호대사龍虎大師라고 한다.
선도에 몰두했던 정북창도 말년에는 ‘이유 없이 몸이 마르는 병’을 앓았는데, 이 병은 특별한 증세 없이 심신이 고달플 때 생긴다고 했다. 일종의 ‘울화병’으로 아마도 불의했던 부친과 다투다가 근심으로 얻은 병으로 보인다. 자신의 병을 연단술煉丹術로써 스스로 치료했다. 그 방법은 ‘폐기-현빈일규-태식-주천화후-결태’의 신선수련법으로, 효과가 뛰어나서 한 달 정도만 하면 백가지 병이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용호비결』에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 대해서 정재서 교수는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도서道書이자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 창작된 최초의 도서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책은 한국 도교사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정렴 당대뿐만 아니라 후세의 선도수행자들의 기본 텍스트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용호비결』의 정기신精氣神론은 조선의 의학사상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의 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 수련의 자부심 용호비결은 말 그대로 ‘용과 호랑이’가 서로 만나 합일되는 요결이라 할 수 있다. 용龍은 물을 말하고, 호虎는 불을 말한다. 용은 물속에 살고 호랑이는 산속에 사니 음양의 이치에 따라 조화균형을 이뤄 무궁무진하게 발전해가게 하는 법이란 뜻이다. 즉 신장의 수기와 심장의 화기가 순환하는 수승화강이 이루어져서 용호합일로 순금, 황금이 이루어지는데 이를 금단金丹이라고 한다. 이때 단丹은 단전이란 뜻 이외에도 태양과 달의 합성어로 영원히 변치 않는 불멸의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용호비결은 당시 수련인들이 중국 도서道書에만 의존해 어렵게 공부하던 실정에서 탈피하여 한국 선도의 입장에서 쉽고 새롭게 쓴 책으로 정북창이 우리 선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북창이 북경에 갔을 때 중국 도사와 설전을 벌여 그를 굴복시켰다는 일화에서도 보듯 북창은 평소 우리 선도에 대한 주체적 의식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북창은 우선 단경(丹經:단학에 관련된 서적들)의 왕이라 칭하는 『참동계參同契』의 난삽함을 비판하고 초학자를 위하여 쉽게 선도에 입문할 수 있는 수련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서 폐기閉氣 태식胎息 주천화후周天火候 등 각 수련법식에 따른 수련의 효과, 즉 신체적 징후 및 정신적 경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명쾌히 해설하고 있다.
“폐기閉氣※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책상다리로 단정히 앉아서 위 눈꺼풀을 내려뜨려 내려다보고 눈으로는 코끝을 대하고, 코로는 배꼽둘레를 대하고 숨을 들이마시기를 오래 계속하고 내쉬기를 조금씩 하여, 늘 신과 기운이 서로 엉키어 배꼽 아래 한 치 세 푼에 있는 단전에 항상 머물게 한다. 항상 생각하여(念念) 공부가 좀 익숙해져서 기의 통로가 배 속에서 한 구멍으로 뚫리면 이 구멍을 현빈일규玄牝一竅※라 하며 이 구멍으로 세상만사 모든 것이 통하게 되는 시초가 된다. 현빈일규로 태식胎息을 하게 되고, 태식으로 주천화후周天火候를 하게 되며, 주천화후를 늘 함으로써 결태結胎가 된다. 그러니 현빈일규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게 된다.”
(※예부터 폐기를 폐식閉息으로 오인하여 숨을 멈추는 식의 호흡공부를 하다가 몸에 부작용이 나타나는 등 잘못되는 사례가 많았다. 이 ‘閉’가 ‘닫는다’는 말이긴 하나 숨[息]이 아니라 기운을 닫는다는 것이다. 폐기는 숨을 멈추지 않고 기운이 단전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배에 기운을 둔다고 하여 복기伏氣라고도 하며, 기운이 차곡차곡 아랫배에 쌓인다 하여 누기累氣, 적기積氣, 축기蓄氣 등과 같은 용어도 사용하는데 모두 같은 의미이다)
(※현빈玄牝: 우주만물을 생성하는 심오한 구멍이라는 뜻, 노자 『도덕경』 제6장)
요체는 자연스럽게 호흡하면서 의식을 단전에 집중하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용호비결은 조선의 수련서이지만 그 근원은 우리의 환국, 배달, 단군조선 때까지 올라간다는 점을 우리는 『환단고기』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환단고기』 「소도경전본훈」 내용을 통해 숨을 자연스럽게 고르고 쉬는 조식調息을 확인해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태곳적 수행법인 주문수행의 원형도 확인해볼 수 있다. 실로 우리 민족 수련문화의 뿌리는 깊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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