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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재난에서 살아남기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일본 헌병憲兵과 순사巡査 본문

한민족의 역사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일본 헌병憲兵과 순사巡査

전종수 2023. 11. 8. 00:01

사실은 순간순간 놓치기 쉽다. 기억으로 붙잡아도 망각의 강으로 스러져간다. 사진은 사실을 붙잡아 두는 훌륭한 도구다. 포착된 사진들은 찰나를 역사로 만들어 준다. 사진 속에서 진실을 찾아보자!


하루는 일본 헌병들이 ‘요술쟁이를 잡는다.’ 하여 약방을 포위하고 숨어서 상제님을 기다리고 있더니 상제님께서 돌아오시어 약방 안으로 들어가시매 포위망을 좁혀 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뛰어드니라. 허나 분명히 방으로 들어가신 상제님이 어디에도 계시지 않거늘 사방을 뒤지며 난리를 피우다가 어리둥절하여 돌아가니라. (도전 5편 309장 5~7절)

일본의 조선 침략 시기 일본은 조선 백성을 통제하기 위해 헌병에 이어 순사 제도를 운영했다. 1907년 제3차 한일 협약의 비공식 조항에 따라, 한국의 경찰권은 일본에 위임되었다. 그리하여 “한국에 주둔하는 헌병에 관한 칙령”이 제정되었다. 이에 따르면, 일본 본토의 헌병은 군사경찰을 주로 하는 데 대하여, 한국에 주둔하는 헌병은 치안 유지를 하는 경찰 업무를 주로 하고, 겸하여 군사경찰을 맡도록 하였다. 이것은 한국 내의 독립운동을 억압하고, 만일의 항일 봉기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일반 경찰보다는 조직력과 기동력이 뛰어난 헌병이 적합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1907년 7월 1일에는 조선에 주둔한 헌병 병력이 부족하다는 평가에 따라 조선인 헌병 보조원 제도를 도입하였다. 헌병 보조원은 육군 이등병 혹은 일등병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여기에 현지 사정에 밝은 조선인들이 대거 지원하였다. 그들은 때로는 일본 헌병들보다 더 적극적이고 더 악랄하게 조선인들을 탄압했다. 그들 때문에 수많은 애국지사와 독립군들이 검거되어 영어의 몸이 되고 또 유명을 달리했다. 일본 헌병들은 법적 절차를 갖지 않고 멋대로 벌금·태형·구류 등의 처벌을 가할 수 있었다. 또한 각종 악랄한 고문으로 증거와 죄명을 날조하기도 했는데, 이들이 사용한 고문 도구는 모두 20여 종이나 됐다. 이들은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된 태형(죄인을 매질하는 형벌)을 1912년에 부활시켰으며, 대나무 대신 소의 음경을 말려 만든 속칭 ‘쇠좆매’를 사용해 매질을 했다. 누구든지 이 ‘쇠좆매’로 50대만 맞으면 죽거나 산송장이 돼 나왔다고 한다. 헌병 제도는 조선인의 극심한 반발로 3.1운동 이후 폐지되고 신임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부임하여 일반 경찰로 대체되었다. 당연히 조선인들에게는 헌병 못지않은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말이 헌병에서 순사로 바뀌었을 뿐이지,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조선 백성들은 일본 경찰들을 일반적으로 순사라고 불렀다. 순사는 순경, 즉 초급 경찰을 말한다. ‘스메에리’라는 넥타이가 필요 없는 검은 양복을 입고 허리께에는 하이도라는 칼을 차고 다녔다. 걸어 다닐 때마다 철커덕 소리가 났기 때문에 이 소리만 들어도 ‘순사 온다’며 조선 사람들은 긴장했다. 일상생활에서 조선인은 이들에게 누구나 죄인 취급을 당했다. 순사들은 무조건 반말로 조선인을 대했다. ‘오이 꼬라(야, 인마)’, 이것이 조선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었으며 항의했다가는 ‘칙쇼! 조센진노 쿠세니(닥쳐! 조선인 주제에)’라고 면박을 받거나 ‘후데이 센징(사상이 불량한 조선인)’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 일쑤였다. 물론 일본인들만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들 가운데에서도 순사직(당연히 최하 계급인 순사보부터 시작)을 뽑았다. 이들 중에는 독립운동가들을 잡고 고문하던 악질 순사들도 있었다. 이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공산당 잡는 경찰로 호의호식하기도 했다.

일제 시대 일본 헌병과 경찰은 잔혹하게 백성들을 탄압했다. 그들은 조선 백성들에게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었다. 오죽하면 우는 아이를 달래 주는 것은 호랑이도 아니고 곶감도 아니고 일본 순사라는 말이 나왔을까. 일본 침략기 철모르는 아이 역시 “왜놈 순사가 온다”는 말을 들으면 공포심으로 인해 울음을 뚝 그쳤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의 혈사』가 전하는 일제의 만행
백암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의 혈사』에서 일제의 만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참조: 환단고기 역주본, 안경전, 상생출판)

“마을의 민가, 교회당, 학교 및 곡식 수만 석을 불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남녀노소를 총으로 죽이고, 칼로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목을 졸라 죽이고, 주먹으로 때려죽이고, 발로 차 죽이고, 도끼로 찍어 죽이고, 생매장하기도 하고, 불에 태우기도 하고, 솥에 삶기도 하고, 몸을 갈가리 찢기도 하고, 코를 꿰기도 하고, 갈비뼈를 발라내기도 하고, 배를 따기도 하고, 머리를 자르기도 하고, 눈알을 뽑기도 하고, 가죽을 벗기기도 하고, 허리를 자르기도 하고, 사지에 못을 박기도 하고, 손과 발을 자르는 등 인간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짓들을 저네들은 오락으로 삼았다. 우리 동포들 중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죽었고, 아비와 아들이 함께 도륙을 당했으며, 그 지아비를 죽여서 그 지어미에게 보였고, 그 아우를 죽여서 그 형에게 보였으며, 죽은 부모의 혼백상자를 끌어안고 도망가던 형제가 함께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고, 더러 산모가 포대기에 아이를 싸안고 달아나다가 모자가 함께 목숨을 잃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