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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 봉奉씨 본문
[한국의 성씨]
하음河陰 봉奉씨
시조 봉우의 묘소와 신도비
우리나라 봉奉씨는 하음·함흥·풍기·진주·연안·양성·강화 등 10여 본관이 있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 하음 봉씨 7,688명, 강화 봉씨 4,165명을 합쳐 봉씨의 인구는 11,853명이었다. 그 밖에 강화 봉씨 약 2,500명, 함흥 봉씨 약 400명, 진주 봉씨 약 390명, 풍기 봉씨 약 150명, 양성 봉씨 약 140명이었다. 문헌에는 10여 본관이 있으나 모두 하음 봉씨에서 분파된 세거지 명이라고 한다. 하음은 강화도 하점면의 옛 이름이다. 하음 봉씨는 고려 인종 때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좌복야左僕射에 봉해진 봉우奉佑를 시조로 하고 있다. 「하음봉씨을축세보河陰奉氏乙丑世譜」 서문에 보면 그의 출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고려 예종 원년(1106년) 어느 날 경기도 강화군 하점면河岾面 장정리長井里 하음산河陰山 기슭 연못가에 상서로운 광채가 비치더니 이어 석함石函이 떠올랐다. 마침 물을 길러 왔던 한 노파가 이상히 여겨 살펴보니 그 속에 용모가 뛰어난 아기가 들어 있었다. 노파가 이를 왕에게 바쳤더니 기이하게 여기고 궁중에서 양육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노파가 봉헌했다고 하여 성을 봉奉이라 하고 이름은 우佑로 하사했다고 한다. 그 후 봉우는 자라면서 재능이 뛰어나 인종조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하음백河陰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그의 봉군지인 하음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의 탄생 설화는 파평 윤씨의 시조(윤신달尹莘達)가 용연지라는 연못 가운데에 있던 옥함玉函 속에서 출생했다는 이야기와 그 내용이 흡사하다. 시조의 묘소는 강화군 화도면 덕포리 마니산에 있다.
하음 봉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봉우의 7세 봉천우奉天佑가 고려 충숙왕이 원나라에 머무는 동안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록되었고, 충목왕이 즉위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정령을 출납하고 궁중을 숙위하던 밀직사의 종2품)에 올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2품 품계)로 하음부원군河陰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봉질奉質과 봉문奉文도 함께 판도판서版圖判書(판도사의 정3품 장관)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강화도 최북단에 위치한 봉천산의 정상에 있는 봉천대奉天臺는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는데, 하늘에 제사 지내기 위하여 봉천우가 만든 제단이라고 한다. 또한 봉일사지삼층석탑奉日寺址三層石塔(인천시 계양구)과 석조여래입상(강화군 하점면)도 봉천우가 세웠다고 하며 보물 615로 지정되었다. 조선조에서는 세종 때 창녕현감을 거쳐 공조·호조 이조 참판을 지내고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오른 봉여奉礪가 딸을 왕세자(문종)에게 출가시켜 왕실의 외척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병조 판서를 지낸 봉집奉楫은 공조 판서 봉뉴奉紐, 이조 판서 봉초 등과 함께 조선 초에 가문을 일으킨 인물들로서 학자로 유명한 봉여해와 더불어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봉집의 아들인 봉여해奉汝該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박팽년, 성삼문 등과 함께 당대의 석학 박중림朴仲林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봉여해는 스승인 박중림의 사위가 되었다. 문장에도 능하여 저서가 많았으나 1456년 사육신의 단종 복위에 가담한 혐의로 죽음을 당하였다. 「사경석의四經釋義」 등 그가 지은 많은 저술이 있었는데 그가 죽은 뒤 모두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이밖에 1453년의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된 후 병조 판서를 지내고 역모죄로 죽임을 당한 봉석주奉石柱와 중종 때 생원生員으로 시정책施政策 10개조十個條를 상소하여 채택된 봉천상奉天祥(?~1521)이 유명했는데, 그는 1521년(중종 16년)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봉천상의 자는 상지祥之이며 연안 출신으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한 봉단의奉端懿, 봉종한奉宗翰, 봉진한奉震翰 등이 가문을 빛냈고 학자로 유명한 봉성민, 봉경륜 등이 있다.
현대 인물로는 봉두완奉斗玩(제11, 12대 국회의원), 봉종헌奉鍾憲(제2대 기상청장), 봉준호(영화감독), 봉중근(야구선수), 봉태규(영화배우) 등이 있다.
★신사무옥 : 1521년(중종 16년)에 일어난 안처겸 권전 이정숙 등의 옥사이다. 안처겸 등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득세한 남곤, 심정 등이 사림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 하여 남곤 등을 제거키로 모의하였는데, 그 자리에 있던 송사련이 이를 고변하여 안처근 등 10여 명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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