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재난에서 살아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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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의 후백제 중심지, 광주와 전주
후삼국 시대를 연 후백제 견훤 대왕
8세기 후반 이후 통일신라統一新羅 말기의 정치 상황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중앙 조정은 분열되었고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났으며, 국가 재정은 파탄에 이르렀다. 그러는 가운데 지방에서 세력을 키워 나라를 세우는 사람까지 생겼다. 그중 가장 먼저 후백제를 세운 견훤甄萱이 있었고 뒤를 이어 태봉을 세운 궁예弓裔가 있었다. 이른바 후삼국後三國 시대였다.
약 천 년의 세월 동안 왕국을 유지해 왔던 신라는 이미 기력이 다한 상태였으므로, 결국 재통일의 주역은 견훤과 궁예의 대결로 압축되는 듯했다. 그러나 태봉의 궁예는 신숭겸 등이 옹립한 왕건王建에 의해 축출되었고 국호는 다시 고려高麗로 환원되었다. 결국 후삼국 쟁투의 주인공은 견훤과 왕건, 이 둘의 싸움이 되었다. 승패는 누가 먼저 신라를 흡수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견훤인가 진훤인가
후백제後百濟를 세운 견훤(재위 892∼935)은 상주尙州 가선현嘉善縣(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시 가은읍) 출신으로 본래 이李씨였다가 뒤에 견甄씨라 하였다. 어릴 적에 호랑이가 젖을 물렸다는 설화 또는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이와 관련해서 ‘견훤’이 아니라 ‘{진훤}}’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즉, 견훤의 ‘질그릇 견甄’은 ‘진’으로 읽는데, 지렁이의 한자 표현이 지훤이라는 것이다. 지렁이는 한자로는 ‘지룡地龍’으로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했다. 조선 시대 안정복은 역사서인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견훤의 거병을 설명하며, “견甄의 음은 진眞이다.”라는 주석을 붙이고 있다(동사강목 제5상, 임자년, 진성 여주 6년, 당唐 소종 경복景福 원년, 892년).
견훤의 가계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농사를 짓다가 가문을 일으켜 장군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고, 견훤 역시 신라군에 들어가 공을 세워 비장裨將이 되었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고기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견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로 볼 때 어머니의 가문은 광주 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견훤이 나라를 열고 첫 수도를 삼은 곳이 광주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부인은 두 명으로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진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 용개龍蓋, 보개寶蓋, 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후백제를 세우다
견훤은 자랄수록 남달리 체모가 뛰어났으며, 뜻을 세워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邊方 비장裨將이 되었다. 당시 신라는 왕조 말기 증상을 보이며 왕실의 권위는 떨어졌고, 지방은 호족들에 의해 점거당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는 몇몇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졌고, 또 기근이 심해 백성들의 유망流亡과 초적草賊의 봉기가 심하였다.
이에 그는 무리를 모아 경주의 서남쪽 주현州縣을 공격했는데, 이르는 곳마다 군중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해 무리가 5천 명에 달했다. 그러자 견훤은 이 여세를 몰아 무진주武珍州, 곧 지금의 광주光州를 점령하고 마침내 892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후백제後百濟를 건국(공식 건국은 완산주完山州, 곧 지금의 전주全州에 도읍을 정한 900년)하여 후삼국 시대를 열게 되었다.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은 925년 후당後唐으로부터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외교적 승인을 얻어 냈고, 이어 중국 남방에 전류錢鏐가 세운 오월吳越에 사신을 보낼 정도로 급성장했다. 대진국(발해)을 멸망시킨 거란과도 통교하고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국제 관계의 변동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서남해안의 비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은 이미 장보고張保皐에 의해 중국과의 무역이 크게 성행했었고, 또 당시 지방 호족들이 중국과 사무역私貿易을 빈번하게 행하던 곳이었다.
승승장구하는 견훤
견훤은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면서 국력을 키워 나갔다. 이후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자, 고려와 후백제는 잦은 세력 다툼을 벌였다. 920년에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陜川)을 함락시켰고 이후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려 하였다. 이에 견훤은 927년 문경과 영천을 습격한 뒤 이어 경주로 진격해 포석정에서 신라의 55대 경애왕景哀王을 살해하고, 왕의 이종사촌 형제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워 사실상 신라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이 소식을 듣고 구원하러 달려온 왕건의 군대와 벌인 공산公山(지금의 대구 팔공산八公山) 싸움에서는 고려의 수뇌부를 다수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림으로써 상당수의 호족들을 회유시켰다. 이때가 견훤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막강했던 세력은 929년(경순왕 3년)의 고창古昌(지금의 경북 안동安東) 전투에서 크게 패전하면서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특히 932년에는 충실한 신하였던 공직龔直이 고려에 투항해 버렸다.
자신이 세운 나라를 스스로 끝내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아들 10여 명을 두었는데, 그중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935년 3월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등이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유폐시켰다.
석 달 동안 유폐되었던 견훤은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혹은 애복哀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고려의 점령지였던 나주羅州로 도망하여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당대의 명장이었던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보尙父의 지위와 식읍을 내렸다. 이후 후백제는 점차 내분이 생겨 왕건에 의해 멸망하였다. 견훤의 아들들은 한때 목숨을 부지했으나, 얼마 뒤 모두 살해되었다. 견훤 또한 우울한 번민에 싸여 지내다가 드디어 창질瘡疾이 나서 충청도 황산黃山에서 사망하였다.
견훤이 후삼국의 쟁패 과정에서 왕건에게 패한 것은 잘못된 후계자 선정 문제도 있지만, 쇠망해 가는 신라의 조직을 세력 기반으로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즉, 왕건처럼 해상 세력과 고구려 부흥을 지향하는 확실한 근거 세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신라 군인으로서 변방에 파견되어 이미 해이해진 신라의 군사 조직을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흡수한 것이다. 또한 권력을 잡고 난 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신라와 똑같은 방식의 권력 구조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시류는 지방 호족이 중심이 되어 신라의 국가 체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는데,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역행하고 호족들의 지지를 잃으면서 몰락했다는 것이다.
후백제의 첫 수도, 빛고을 광주 이야기
견훤이 첫 도읍지로 정한 광주光州는 오랫동안 호남의 중요 도시 중 하나이기는 했지만, 대표 도시로 떠오른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과거 광주읍 일대는 광주천과 무등산無等山에서 흘러나온 수많은 소하천들로 인해 늪지가 많았다. 물이 많은 들판이라 해서 ‘물들’이라는 지명으로 불렸고, 발음의 편의를 위해 물들에서 ‘무들’, ‘무등’ 등으로 바꿔 불렸다고 한다.
이후 신라 경덕왕 때 전국 지명의 한자화 정책에 의해 ‘물들’에서 ‘무주武州’가 되었고, 여기에 보배 진珍을 넣어 무진주武珍州, 무진武珍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광주의 진산鎭山인 무등산은 물들의 뒷산이라 하여 무들산, 무등산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다가 고려 시대에는 무진주에서 ‘광주光州’로 명칭 변경이 되었다. 여기에는 여러 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이야기는 이렇다. 현재 광주 외곽에서 옛 광주 구시가지(동구 일대)로 진입하려면 영산강榮山江을 건너야 하는데, 이 영산강이 광주 지역에서 불리는 이름이 ‘극락강極樂江’이었다. 이 극락강을 넘어 도착할 수 있는 땅, 즉 무등산 아래 불국정토의 땅이라고 해서 ‘빛[光] 고을[州]’이라 했다는 설이다. 고려 말의 문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이 쓴 〈석서정기石犀亭記〉에는 “빛의 고을(光之州)은 지세가 다 큰 산인데 북쪽만 평탄하다.”라는 내용이 글머리에 기술되어 있다.
물 많은 도시, 광주
의외로 광주는 해안과 가까이 있다. 광주시청에서 서해까지는 약 35킬로미터 정도로 해안과 내륙 기후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다. 지금이야 습지가 아니지만, 과거 황룡강과 영산강 지류가 이 도시에 합류해서 영산강으로 흘러가는데, 많은 비가 오면 합류 지점이 범람하곤 했다. 특히 광주천光州川은 무등산 증심사 계곡과 용추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학동 삼거리에서 합류하여 예로부터 자주 범람해 근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수해를 막기 위해 둑을 쌓아 물길을 다스리고, 물을 제압하는 기운이 있다는 물소를 돌로 깎아 세워 두기도 했다. 이와 관련된 유적이 광주천 변에 세운 석서정石犀亭이다.
석서石犀(돌로 만든 물소)는 중국 진秦나라 소왕昭王 때 촉군蜀郡 지역의 태수였던 이빙李氷과 이랑李郞 부자가 도강언都江堰이라는 제방을 축조한 다음에 물소의 형상을 한 수위표를 세워 치수治水의 성공을 알렸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도강언 건립 후 파촉 지방 농민들의 삶이 극적으로 향상되었기 때문에 이빙 부자는 물의 신으로 숭배받았다. 이 도강언은 훗날 촉한의 재상 제갈량이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정비하기도 하였다. 이후 돌로 만든 물소 즉, 석서는 치수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광주의 의혈義血 역사
892년 견훤은 광주를 점령하였다. 이때는 광주가 역사상 한 나라의 중심에 걸맞는 위치를 가졌던 유일한 시기일 것이다. 견훤은 2년 뒤 완산주完山州(지금의 전주全州)로 옮겨 가서 왕이라 칭하고 후백제를 정식으로 건국했다. 아무래도 전주가 광주보다 유력한 고장이고, 백제 부흥이라는 명분을 세우며 백제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는 전주가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견훤은 사위인 지훤池萱을 무주武州(광주)의 성주로 삼아 이곳을 중시하는 뜻을 보였다. 이후 왕건이 천하를 평정한 뒤 940년에 무주武州라는 지명을 ‘광주光州’로 고쳤다. 하지만 견훤이 처음 득세한 땅이라는 점 때문에 고려 조정에서는 내내 좋게 보지 않았고, 이는 조선까지 이어졌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 광주목사였던 권율權慄이 공을 세우자, 나주목사로 승진 발령을 내렸다는 것을 보면 고을의 격은 나주가 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광주는 대일 항쟁기가 되어서야 호남의 대표 도시로 발돋움했다. 물론 이는 풍부한 물산이 나는 전남 지역의 물류 중심지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임진왜란 당시 유일하게 왜군이 진입하지 못한 호남 지역에 대해서 충무공 이순신 통제사는 절상호남국가지보장竊想湖南國家之保障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 했다. 이는 ‘혼자서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 보니 호남이야말로 나라를 지키는 울타리다. 만약 호남이 없었으면 곧바로 나라는 없어졌을 것이다.’(1593년 7월 16일 현덕승玄德升에게 쓴 편지 중)라는 뜻으로, 호남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호남의 풍부한 물산과 이쪽으로 몰려든 조선 사람들의 힘이 국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광주는 동학東學을 위시해서 한말 의병 운동의 중심지였다. 전국 의병 중 수적으로 가장 많은 의병이 호남 의병이었다. 일본은 ‘남한 대토벌’이라는 명분으로 호남 지역을 초토화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제에 의해 호남 의병의 중심지가 만주로 옮겨간 뒤에 대한제국의 국권이 피탈되었다.
아무튼 평소 점잖다가도 한번 화가 나면 물불 안 가리는 광주 지역 사람들의 숭무崇武 기질도 한몫했던 것 같다. 광주 지역의 의혈 숭무 기질은 광주를 대표하는 두 개의 도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바로 금남로錦南路와 충장로忠壯路다.
행정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금남로는 충무공 정충신鄭忠信(시호가 이순신 통제사와 같은 충무忠武이다)의 봉호인 금남군錦南君에서 따왔다. 당시 광주목사였던 권율의 노복奴僕 역할을 했던 정충신은 목숨을 걸고 일본군 점령지를 혼자서 돌파해 의주에 피신 중인 선조宣祖에게 조선군 승리의 소식을 전했다. 이에 면천되어 백사 이항복李恒福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후에도 후금後金에 대한 첩보 활동을 벌였고 이괄의 난 진압과 정묘호란 때 나라를 위해 충성을 바쳤으며, 스승인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하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데도 유배를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자 함께 따라가 봉양하기도 했다. 이름대로 충성과 신의를 다 바친 인물이었다. 또한 이 금남로는 5.18 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주요 장소이자 상징으로 꼽히는 곳이다.
과거 상권의 중심지였던 충장로는 대일 항쟁기에는 ‘거주지의 으뜸’을 뜻하는 혼마치本町라 했는데, 해방 이후 임진왜란 때 활약한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의 시호 ‘충장공’에서 따온 현재의 이름으로 바꿨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의병 운동은 그대로 독립 전쟁으로 연결되었고 불의에 항거하는 정의로움의 상징으로 이어졌다. 1919년 3.1운동, 1920년대의 소작쟁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고, 해방 후 1960년에는 3.15 부정 선거에 대한 최초의 항의 시위가 발생한 곳이었다.
1979년과 1980년은 광주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해였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이 일어나 전두환 등의 신군부가 등장했고,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신군부 세력에 의해 “전국 비상계엄 확대, 정치 활동 일체 금지, 국회 해산” 등이 발표되며 헌법과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또 다른 내란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20여 년 만에 찾아온 민주화의 봄을 빼앗기고, 오랫동안 지지하고 기대해 온 지도자까지 상실한 광주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에 신군부는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훈련된 최정예 특수부대를 계엄군으로 투입하여 광주 시민들을 상대로 무력 진압에 나섰다. 이는 곧바로 광주민주화항쟁을 촉발시켰다. 무고한 시민들과 상부의 명으로 투입된 계엄군 사이의 충돌로 인해 엄청난 사상자와 함께 풀리지 않은 원한, 지워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트라우마가 역사에 새겨졌다.
하지만 광주의 가슴 아픈 역사에 대해 위무하거나 치유하는 조치는 1980년 이후 아무런 실질적 진전 없이 세월에 묻혀 가고 있다. 광주를 진정한 빛고을로 만들 수 있는 역사적 책임과 실천 의지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후백제의 수도, 온고을 전주全州
초기 무진주에 자리를 잡은 견훤이 서쪽 완산주에 이르자 백성들이 크게 환영했다. 견훤은 신라와 당 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것을 비판하면서 “지금 내가 감히 완산에 도읍해서 의자왕의 오래된 울분을 씻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자신이 백제를 계승했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그는 실제로 900년에 완산주를 도읍으로 정하고 후백제後百濟(892~936)를 건국했다. 당시에 사용한 공식 국호는 ‘백제’였으며, ‘후백제’는 후대인들이 이전에 존재하였던 백제와 구별하기 위해 붙인 이름이다.
전주는 신라 시대의 행정 중심이면서 군사 중심이었던 곳이다. 지금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있는 동고산성東固山城은 견훤의 궁궐이 있던 곳으로, 최근 발굴에서 매우 거대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좀 더 떨어진 남고산성南固山城은 이 궁궐을 방위하기 위해 쌓았다고 하는데, 근처에 있는 남고사南固寺라는 절에서는 승려들이 성을 쌓고 지키는 일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견훤은 고창 전투 등에 승병을 투입했을 정도로 불교, 그중에서도 진표 율사眞表律師의 법상종法相宗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진표 율사는 미륵 부처님 신앙을 계승, 발전시킨 고승이다. 후고구려(태봉)의 궁예도 스스로 미륵이라 칭했으니, 후삼국은 저마다 현세의 미륵이 되려는 영웅들의 대결장이었던 셈이다. 견훤이 후계자 선정의 잘못으로 장남인 신검에 의해 유폐된 곳이 바로 미륵 신앙의 성지인 금산사金山寺이다.
고려 시대의 전주
후백제가 내분으로 망해 고려의 천하가 된 다음에도 전주의 지위가 당장 낮아지지는 않았지만, 고려 황실의 꾸준한 의심을 받았던 것 같다. 1011년 제2차 거란 전쟁에서 개경을 떠나 남쪽으로 몽진했던 현종顯宗 일행은 공주에서는 극진한 대접을 받아서 극찬했지만, 전주에서는 전주절도사 조용겸趙容謙이 현종을 억류하려고 하여 이를 피했을 정도였다.
이후 전주는 몽골과의 관계에서 다시 이름이 나오는데, 고려에 사신으로 와 행패를 부리는 야사불화埜思不花란 자가 있었다. 본래 고려 사람으로, 원元나라에 들어가 순제順帝에게 총애를 받았다. 그의 형 서신계徐臣桂와 아우 서응려徐應呂가 그를 믿고 고려에 권세를 부리며 행패를 일삼았다.
1355년(공민왕 4년) 2월 어향사御香使 야사불화가 접반사 홍원철 등과 함께 전주에 이르러 전라도 안렴사 정지상鄭之祥(고려 중기 묘청과 함께 서경 천도론을 폈던 시인 정지상鄭知常과는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격분한 정지상은 야사불화 일행을 붙잡아서 가두고, 그가 찼던 금패를 빼앗아 서울로 달려가다가 공주에 이르러 야사불화의 동생 서응려를 붙잡아 철퇴로 때려 죽게 한 뒤 공민왕에게 가서 사실을 고하였다. 공민왕은 매우 놀라 정지상을 순군옥巡軍獄에 하옥시키고, 금패를 야사불화에게 돌려주는 한편, 전주목을 부곡部曲으로 강등시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그러나 공민왕은 얼마 후 부원附元 세력인 기철 등을 처단하고 정지상을 석방한 후 호부시랑戶部侍郎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승진시키고, 다음 해 전주를 완산부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전주는 공민왕 시절 반원 자주 정책의 대표적인 고을로 주목받게 되었다.
정지상은 고려 공민왕 때의 충신이며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기록된 인물로, 어려서부터 불의를 미워하고 성격이 대쪽 같아 어떤 비행이든 용서치 않았다고 한다. 누이가 원나라에 잡혀갔으므로 원나라에 자주 내왕하다가 뒷날 공민왕이 된 강릉대군江陵大君을 시종한 공이 있다. 정지상은 원나라를 등에 업고 불의를 자행하던 부원 세력에 맞서 고려의 민족정기와 자주정신을 회복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죽은 뒤 부인은 담양潭陽에서 살다가 왜적에게 살해되었는데, 아들 정혼鄭渾이 왜적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고, 박위朴葳와 함께 대마도를 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정지상의 기록은 『환단고기桓檀古記』 「태백일사太白逸史」 〈고려국본기高麗國本紀〉에 나와 있다.
‘풍패지관’, 전주
이후 전주는 조선이 들어서면서 왕조의 발상지로 중시받았다. 1380년 이성계가 남원 쪽에서 왜구를 섬멸한 황산대첩을 치르고 개경으로 가던 중 전주 오목대梧木臺에 들러 종친들과 잔치를 벌였다. 이때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부른 〈대풍가大風歌〉를 불렀다고 한다. 천하를 평정한 제왕의 노래를 부른 이성계에게 이미 고려는 자신의 나라였다.
지금 전주에 남은 문화재 대부분이 조선 전기에 생겨났다. 그런데 1589년 전주 출신 정여립鄭汝立이 주도했다고 알려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정여립을 비롯한 당사자들의 심문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채 종결되어, 과연 역모 자체가 있었는지를 포함하여 많은 의문이 남은 사건으로 역사에서는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한다. 대규모 역모 사건이 일어난 이상 전주에도 서릿발이 쳐야 했지만, 전주는 반역한 향 지정과 그에 따른 격하를 면했다. 전주는 조선의 왕성王姓인 전주 이씨의 ‘풍패지향’이기 때문이었다. 풍패지향豐沛之鄕은 한漢나라 고조의 사례에서 비롯된 말로, 건국자의 고향을 뜻하는 관용어이다. 전주의 객사에 달린 현판이 ‘풍패지관豊沛之館’인 이유는 여기서 유래한다.
조선 후기와 근대의 전주
조선 후기 전주는 호남 지역의 재화가 모이고 시장을 통한 유통이 활발한 중심지가 되었다. 이즈음 유명한 향토 요리가 나왔다. 전주의 비빔밥은 왕실과 연관 있는 양반집들이 궁중의 골동반骨董飯을 흉내를 내 만들었고, 콩나물국밥은 전주성을 드나드는 장사치들이 해장과 끼니를 위해 만든 것이다.
전주는 근대에 이르러 1894년 일어난 동학혁명東學革命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일 항쟁기 곡식의 집산지인 전주는 다른 지역보다 더 심한 수탈을 겪었다. 전주성은 헐리고 사대문 중 풍남문豐南門만 남기고 모두 없어졌다. 관찰사 관저였던 선화당도 사라지고 예종睿宗 대왕 태실도 도굴 및 훼손되었다.
우리 것을 마구 없애는 일제에 대한 반발로 한옥韓屋을 지키고, 새로 짓고 하면서 지금의 전주 한옥 마을이 이루어졌다. 한옥 마을은 경기전, 풍남문, 오목대, 전동성당 등 전통 유산이 비교적 가깝게 몰려 있는 관광 지역이 되었다. 반대로 고급 주거지 건축인 전주에코시티 개발을 시작으로 고층 건물들도 계속 들어서고 있다. 이런 반대되는 움직임이 조화를 이룬다면 문화를 잘 보전한 구시가지와 생활 및 비즈니스의 중심이 되는 신시가지가 나누어지는 파리나 로마와 비슷하게 발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낡은 것과 새것, 양반과 상인, 붉고 푸르고 노랗고 검은 것들이 뒤섞이면서도 절대 잡스럽지 않은 조화를 이룬다. 밥과 채소, 고기가 어우러진 비빔밥처럼, 서로 다른 곡식을 푹 익혀서 완성을 시키는 시루처럼, 이질적인 존재를 이해하고 포용하면서 하나로 어우르며 발전하는 지혜와 도량을 지닌 온전한 도시, 이것이 바로 온전한 고을, 전주의 품격이지 않을까?
후삼국의 주역 견훤과 왕건, 전격 비교!
918년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의 왕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견훤과 왕건이 대립하는 구도가 펼쳐졌다.
초기에는 견훤이 우세했다. 거칠 것이 없던 견훤은 급기야 927년에 신라의 수도 금성金城을 점령하여 국왕(경애왕)을 죽이고 새 국왕(경순왕)을 세워 세력을 과시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공산성(지금의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구원군으로 오던 왕건의 고려군을 크게 격파했다. 이때 개국 공신 신숭겸申崇謙 등 8명의 장수가 태조 왕건 대신 목숨을 바치는 위왕대사爲王代死의 충절을 보여 주었다.
절치부심한 태조 왕건은 후에 930년 고창(지금의 경북 안동)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대결은 계속되었지만, 호족들의 지지를 받는 왕건이 점차 우세해졌다.
고려 태조 왕건의 호족 정책
왕건은 즉위하자마자 호족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중폐비사重幣卑辭’라 하여 호족들에게 선물을 두둑이 보내고 자신을 낮춤으로써 호족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이에 왕건에게 귀부하는 호족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견훤의 아버지인 아자개도 있었다. 아울러 혼인 정책을 펴서 기록상 스물아홉 명의 아내를 두었다. 왕건은 세금을 감면하여 민생을 회복하고 민심을 얻고자 하였으며 신라와도 친선 정책을 취했는데, 결국 935년 신라 경순왕이 귀부함으로써 고려 천하를 이루었다.
내부에서부터 몰락한 견훤의 후백제
반면 견훤에게서는 호족 우대 정책이나 민심을 얻기 위한 특별한 정책이 보이지 않았다. 신라에 대해서는 반감을 표출하여 경주를 침략해 약탈하였으며 경애왕을 죽이고 왕비를 범하는 등의 패륜적 만행을 저질러 후일에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여기에 치명적으로 후계 자리를 둘러싼 내분이 일어나 맏아들 신검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미륵 신앙의 본산지인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결국 왕건에게 귀부하는 신세가 되었다. 고려와 후백제의 마지막 싸움인 일리천一利川 전투에서 선두에 선 견훤은 자신이 세운 후백제의 명운을 자신의 손으로 끝냈다. 신검은 사로잡혔고, 국왕에 대한 예우로 관작을 내리니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난 견훤은 충청도 황산군(지금의 논산)에서 죽음을 맞았다.
왕건은 태평성대를 열겠다는 의지를 담아 충청도 연산 땅에 개태사開泰寺를 지었다. 반세기 동안 지속된 전쟁의 상처를 달래고 평화를 염원하는 뜻에서 세워진 사찰이고, 아비를 내쫓고 동생을 죽여 왕위를 찬탈한 아들의 패륜을 끝내 용서하지 않은 채 죽은 견훤의 영혼을 달래려는 뜻을 담았다.
견훤은 당시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삼한 통합이라는 희망의 깃발을 맨 먼저 세운 영웅 군주였다. 한때 고려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세웠던 적도 있었고, 서라벌 기습전으로 신라의 임금까지 갈아 치웠을 정도로 위세가 강력한 패왕이었다. 개인적으로도 훌륭한 야전 사령관에 공산 전투에서 왕건의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뛰어난 전술가의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육상에서의 군사적 능력만으로 따지면 왕건보다 뛰어나서 태봉의 궁예, 유금필과 함께 후삼국 시대 최고의 명장이다. 불가능해 보일 만큼 어려운 과업을 해낸 것으로 그야말로 맨손으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이런 자수성가형 인물들이 대개 그렇듯이 독선적인 면이 강해서, 호족 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인 신검 대신에 후처의 아들인 금강을 태자로 삼으려 했다가 내분이 발생하여 권좌에서 쫓겨났다. 이후 자신이 세운 나라를 자신이 문을 닫는 비운의 주역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그로 인해 궁예와 왕건은 영웅 군주의 꿈을 가질 수 있었고, 결국 삼한 통합의 꿈을 실현한 이는 고려 태조 왕건이었다. 고려는 왕건 이후 공양왕까지 34대 474년간 동아시아를 호령했다. ■
견훤은 광주 사람인가?
견훤은 경북 문경시에서 나고 상주에서 자랐다는 게 지금까지의 정설인데, 광주가 고향이라는 설화가 있다. 바로 출생지가 광주광역시 북구 생용동生龍洞이라는 내용인데, 지렁이 설화와 관련하여 지렁이를 토룡이라고 하는 데서 나온 유래로 추정된다. 견훤과 관련된 동네에 용龍 자를 붙였는데 대표적인 곳이 생용동이다.
생용동은 말 그대로 ‘용이 태어난 곳’으로, 예전에 견훤이 탄생한 곳으로 알려졌다. 『광주읍지光州邑誌』에 따르면, 광주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이 생용동인데, 이는 임금이 태어난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견훤이 태어난 곳을 생용동이라 하고, 견훤이 글을 배운 곳을 서당골이라 불렀다.
또한, 성안에 성지골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견훤이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견훤이 훈련한 성안은 흙으로 만들었지만, 현재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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