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재난에서 살아남기
관촉사 은진미륵을 만나다 본문
(김일부 대성사는) 아침저녁으로 반야산 기슭에 있는 관촉사를 찾아가 은진(恩津)미륵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니라. (도전 1편 9장 6절)
날이 참 좋다. 봄날답게 온화한 날씨에 맑은 햇빛, 길가에 핀 꽃들은 새로운 생명을 노래하고, 미륵님을 친견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계룡산과 향적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돌면 백제의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의 충혼이 서린 황산벌을 만나게 된다. 그곳을 지나 너른 벌판길을 가다 보면 야트막한 야산이 나온다. 바로 지혜의 산, 반야산. 이곳은 민중들 염원이 담긴 은진미륵님이 계신 곳이다. 절은 참으로 아기자기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절의 주인인 미륵부처님만 바라보게 되어 있다. 본래 이곳은 출입구인 해탈문(불이문不二門)과 석탑, 배례석, 석등 그리고 미륵부처님 석상만 있는 단순한 구조였다고 한다. 이후 여러 전각들이 세워져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전한다.
불상의 키는 약 18.1m 정도 되고, 체구에 비하여 얼굴이 큰 편으로 4등신의 어린 아이 같은 인체비율로 되어 있다. 옆으로 긴 눈, 넓은 코 꽉 다문 입 등은 보면 볼수록 친숙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특히 이 불상의 특징인 큰 얼굴은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럽고 비례미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가까이 가서 참배를 하며 아래에서 위를 우러러보면 그 모습의 자연스러움을 깨닫게 될 것이다. 즉 멀리서 바라만 보는 경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무릎 아래에서 경배를 올리면서 좀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그런 분이구나 하는 점을. 또한 미륵부처님이 지긋이 바라보는 모습을 뵈면 중생들을 다 제도하고자 하시는 자비로운 부처의 모습, 어버이의 모습으로 우리 옆에 서 계시다는 것을.
머리 위 네모난 2층 천개(갓) 네 귀퉁이에 달린 청동 풍경 소리를 정겹게 들으며 불상 앞에 있는 미륵전에 들어가 보았다. 미륵전 안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다. 육 여사가 서거했을 당시 관촉사에서는 그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자발적으로 천도식을 올리며 명복을 빌었던 게 인연이 되었다고 한다.
은진미륵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내려온다.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인 고려 광종 19년 968년에 충청도 은진 땅에 문득 아기 울음소리가 나면서 큰 바위가 솟아났다. 당시 피의 숙청으로 고려 초기 기반을 다지던 광종은 이 돌로 불상을 조성하기로 했다. 970년부터 혜명대사는 수많은 석공을 거느리고 공사에 들어갔다. 이후 37년이라는 긴 시간을 들여 1006년(목종 9년)에 불상이 완성되었다. 공사 중 불상의 머리가 너무 거대하여 세우지 못하게 되자 혜명 대사는 깊은 시름에 빠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제촌을 지나면서 한 쌍의 동자들이 진흙으로 3단 불상을 쌓으며 노는 것을 보게 된다. 동자들은 먼저 땅을 평평하게 하여 그 아랫부분을 세운 뒤 모래를 경사지게 쌓아 그 중간과 윗부분을 세운 다음 모래를 파내었다. 이 모습을 본 혜명 대사는 크게 깨닫게 되어 이 방법으로 불상을 완성했다. 사람들은 이 동자들을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화현이라고 믿었다. 불상을 완공하고 흙을 치우자 하늘에서는 비가 내려 불상의 흙을 말끔히 씻어주었고(灌佛) 상서로운 기운이 3.7일 동안 주위에 서리고 미간의 옥호玉毫가 멀리 빛을 발했다고 한다. 그때 송나라 명승인 지안智眼이 그 빛을 따라 이곳에 와서 불상에 예배를 한 후 ‘마치 촛불을 보는 것처럼 빛나는 미륵불(燭)’이라고 감탄하여 절 이름을 관촉사灌燭寺라 하였다. 불상의 수인手印의 모습과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 화관이 있는 모습 등으로 미루어 본래는 관세음보살로 조성되었다.
하지만 본래 미륵 신앙이 강했던 백제의 지역이었던 이곳 민중들은 미륵부처님으로 여겨 신앙했고 지금은 명실상부하게 미륵부처님으로 경배하고 있다. 이 불상에는 많은 영험담이 내려오는데, 중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쳐들어와 압록강을 건널 때, 이 불상이 노립승蘆笠僧(삿갓을 쓴 승려)으로 변하여 옷을 걷고 강을 건너니 모두 그 강이 얕은 줄 알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과반수가 빠져 죽었다. 이에 적장이 칼로 그 삿갓을 치자 쓰고 있던 개관蓋冠이 약간 부서졌는데,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국가가 태평하면 불상의 몸이 빛나고 서기가 허공에 서리며, 난이 있게 되면 온몸에서 땀이 흐르고 손에 쥔 꽃이 색을 잃었다는 등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또한 조선 말, 들 너머 향적산에서 공부하며 역학易學의 완성체인 정역을 쓰신 김일부 대성사께서도 아침저녁으로 이곳으로 와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리셨다고 한다. 천년의 풍상을 겪어온 미륵 불상을 뵈며, 다시 한 번 정성스럽게 사배를 올려 본다. 산문을 나오는 봄날 오후, 꽃잎이 비처럼 쏟아졌다.
미륵불상의 특징
첫째, 미륵불은 입불立佛이고 석가불은 좌불坐佛이다. 미륵불은 홀로 수행에만 정진하지 않고 세상을 바삐 돌아다니며 민중과 고락을 함께한다.
둘째, 미륵불은 관冠을 쓰고 있다. 특히 황제가 쓰는 면류관을 쓰고 있다. 이는 미륵불의 위격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단서다. 면류관은 미륵불이 통치의 개념도 같이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미륵불이 혹 앉아 있을 수도 있는데, 이때는 반드시 보좌寶座에 앉아계신다. 앉아있다고 해서 좌선을 하는 모습이 아니다. 제왕이 왕좌에 앉아 계신 모습과 같다.
넷째, 미륵불은 손에 여의주如意珠를 들고 있다. 여의주는 모든 일을 뜻대로 이룰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낸다. 미륵불은 천지만물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시는 조화의 부처인 것이다. 불가에서는 미륵불이 있는 궁전을 여의전이라고도 한다.
수행승 미륵과 미륵불은 연계성이 없다
불교 최고最古 경전인 숫파니파타 마지막 장인 피안도품에 바바리 16제자에 대한 내용이 나오지만 수행승 미륵이 미래불이 된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팔리어 연구의 권위자인 리스 데이비스는 미래불인 미륵불은 수행승 미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한 미륵사상 연구의 대가인 일본의 와타나베 쇼코도 미륵하생경, 미륵대성불경 등 미륵불과 관련된 주요 경전에 수행승 미륵이 미래불이 된다는 내용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음을 밝혀내었다. 미륵은 석가의 선언 그대로 도솔천의 천주님이며 하느님이다. 석가는 도솔천에서 호명보살로 불리던 구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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