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재난에서 살아남기
후천선경 건설의 대문명신大文明神 진묵대사震默大師 본문
*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길 “진묵이 천상에 올라가 온갖 묘법妙法을 배워 내려 좋은 세상을 꾸미려 하다가 김봉곡에게 참혹히 죽은 뒤에 원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건너가서 문명 개발에 역사役事하였나니 이제 그를 해원시켜 고국으로 돌아와 선경 건설에 역사하게 하리라. (도전道典 4편 14장 4~6절)
* 공우가 잠시 후에 “그럼 큰아들 주신主神은 누구입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진묵震默이니라.” 하시거늘 (도전 5편 337장 6절)
*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운장雲長과 진묵震默은 나의 보필이니 상제님과 나의 사략史略을 편찬할 사람은 진묵밖에 없느니라. (도전 11편 244장 4~5절)
* 태모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도통을 하려면 진묵震默과 같은 도통을 해야 하느니라.” 하시니라. (도전 11편 286장 4절)
어느 부처의 하루
조선 인조 때 어느 더운 여름날의 변산邊山 월명암月明庵. 월명암은 부설浮雪거사 일가족(부설거사, 부인 묘화妙花, 아들 등운登雲, 딸 월명月明)이 함께 도통한 자리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한 스님이 능엄삼매楞嚴三昧에 빠져 있다. 모시던 시자侍者가 때마침 속가에 제사가 있어 갔다 와야 해서 공양물을 지어 놓고 산을 내려가 내일 온다고 고했다. 이 때 스님은 방안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손을 문지방에 대고서 능엄경(楞嚴經: 밀교사상과 선종의 사상을 설한 대승경전)을 읽고 있었다. 이튿날 시자가 올라와 보니 밥상은 그대로고 스님의 자세도 그대로인데, 스님의 손에서 피가 흘러 내려 그대로 말라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바람이 불어 닫힌 문이 계속해서 문지방 댄 손을 찧어 피가 흘러나오는 데도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삼매三昧(수행에 있어서 최고의 정신 집중 상태)에 들었던 것이다. 스님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잊고 마음도 몸도 다 벗어버리고 초월한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삼매에서 깨어난 스님은 평소 좋아하는 술을 거르고 있는 다른 중에게 무엇을 거르는가 하고 물었다. 스님이 평소 술을 곡차穀茶(주1)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고 하면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그 중은 스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술을 거른다고 거듭 대답하여, 결국 스님에게 곡차 공양을 하지 않았다. 이에 스님은 희망을 잃고 다음 길을 가는데, 얼마 뒤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나타나 그 중을 타살해 버렸다.
이후 절문을 떠나 길을 나선 스님은 냇가에서 천렵川獵(냇물에서 하는 고기잡이)을 한 뒤 매운탕을 끓이고 있는 소년 무리들을 만났다. 스님이 이 광경을 보고 탄식하면서, “이 무고한 물고기들이 화탕火湯지옥의 고생을 하는구나!” 하니, 한 소년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선사께서도 이 고깃국을 드시겠습니까?” 하니 “나야 잘 먹지” 하였다. 이에 소년이 “저 한 솥을 선사께 맡기겠으니 다 드시오.” 하였다. 이에 스님이 솥을 들어 입에 대고 순식간에 남김없이 다 먹어 버리자, 소년들은 살생하지 말라는 계율을 어기고 고깃국을 다 먹었다고 조롱하였다. 이에 말씀하시길 “물고기를 죽인 것은 내가 아니지만 그것을 살리는 것은 내게 있다”고 말하며 냇가에 가서 뒤를 보니 무수한 고기들이 살아서 헤엄쳐 갔다. 이에 소년들이 탄복하고는 그물을 거두어 가지고 돌아갔다.
중간에 전주 장날을 맞이하여, 시장에서 좌선坐禪을 하였다. 곁눈질이나 멀리 있는 앞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코앞에 보이는 것만 바라보면서 다니기에 그 밖의 것에 눈을 빼앗기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종일 시장을 돌아보았지만 정작 바라본 것은 하나도 없었다. 평소에도 스스로 수행의 경계를 알아보기 위해 번잡한 시장에 나갔던 스님은 오늘도 또한 수행을 하였다. 욕심이 동하면 수행이 잘 되지 않았기에 오늘 장은 망쳤다고 하고 일어섰고, 동하지 않아 수행이 잘 되면 “오늘은 장을 잘 봤다”고 하였다. 오늘은 장을 잘 봤다. 어스름이 찾아올 즈음 어머니를 뵙기 위해 왜막촌으로 가는 길에서 흥이 돋은 스님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却嫌長袖掛崑崙(각혐장수괘곤륜)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통으로 삼아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도리어 긴 소맷자락 곤륜산에 걸릴까 꺼려지노라
유유자적하고 무위 자연한 소요유逍遙遊(한가롭게 거닐며 노는 것)의 경지를 보여주면서 호호탕탕한 스님의 모습은 명리를 초탈하여 아무 것에도 속박 받지 않은 대자유인大自由人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윽고 도착한 왜막촌에는 7세 때 출가한 이후 봉양해 온 늙은 어머니가 계셨다. 스님은 그 마을 뒤에 있는 일출암에 머물렀다. 이 여름에는 유난히 모기가 극성을 부려 모친이 괴로움을 호소하니 스님은 산신령에게 고하여 모기를 다 쫓아버리게 하였고, 그 뒤로 지금까지 이 마을에는 모기의 괴로움이 영원히 없어지게 되었다. 어머니가 해주신 보리밥 한 덩이와 보글보글 맛있게 끓인 된장국에 누이가 거른 곡차로 저녁을 맛있게 먹은 스님은 또다시 입정삼매에 들었다. 만경들녘에는 휘영청 밝은 백중百中일의 보름달이 대지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부처의 화신 진묵대사
위 이야기들은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 정약용과 교류하였고 우리나라 차茶의 성인으로 불리는 의순意恂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가 쓴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주2)에 나온 설화 중 일부를 하루 시간 순으로 배열해 본 것이다. 이 설화의 주인공인 진묵대사震默大師는 조선 중기 명종 17년 임술년(1562)에 태어나 인조 11년 계유년(1633) 10월 28일에 세상을 떠난 고승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나옹懶翁대사와 더불어 석가모니 후신불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름은 일옥一玉이며, 진묵震默은 그의 호로 김제군 만경萬頃면 화포火浦리에서 태어났는데, 이 화포리란 곳은 옛날의 불거촌佛居村으로 부처가 살았던 마을이란 의미를 나타낸다. 어머니는 조의씨調意氏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아마도 [비화경悲華經]을 인용하여 진묵대사가 부처의 화신이란 점을 은연중 암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비화경에 나오는 바다의 신인 대비보살의 어머니가 바로 조의씨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제주 고高씨로도 알려져 있다. 대사가 태어날 때 불거촌의 초목이 3년 동안이나 시들어서 말라 죽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불세출의 기운을 타고났다.’고 하였다. 태어나서 냄새나는 채소와 비린내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성품은 지혜롭고 마음은 자비로웠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7세에 출가하여 전주의 서방산西方山에 있는 봉서사鳳捿寺에서 불교경전을 읽었는데,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영특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 현묘한 이치를 환하게 알았다. 봉서사는 출가와 입적, 승려 생활의 시작과 끝을 보낸 곳으로,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종남산終南山과 서방산의 계곡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서방산이 봉황(鳳)이 머무는(捿) 형상이고,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며 봉황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솟아오른 봉우리 한가운데에 봉서사가 자리한다고 한다.
대사는 스스로를 석가모니의 후신으로 언급하였는데, 하루는 목욕을 하고서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고는 지팡이를 끌면서 산문 밖을 나섰다. 개울가를 따라 거닐다가 지팡이를 세우고 물가를 내려다보며 서 있다가 손으로 물속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가리키면서 시자에게 말했다. ‘저것이 석가모니의 그림자이니라.’ 이에 시자가 말했다. ‘이것은 스님의 그림자입니다.’ 대사가 말했다. ‘너는 다만 나의 거짓 모습만 알 뿐이지 석가모니의 참 모습은 알지 못하는구나. 내가 일찍이 ‘석가현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내가 멸도한 뒤에 나옹이라 하는 한 비구가 있을 것이니 나의 몸이라 하였고, 또 이름을 진묵이라 하는 한 비구가 나올 것이니 나의 몸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사가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부처의 참모습을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리라.
대사는 불가의 인물이지만, 이미 그 경계를 뛰어넘어 유불선儒佛仙 삼교에 회통會通한 인물이었다. 타자구원보다는 자기구원에만 집착하는 소승불교를 비판하고(16나한을 꾸짖는 설화), 명리승인 서산대사를 비판하면서(주3) 중생들의 생활 속에서 중생을 제도하는 진정한 보살행을 행함으로써 부처의 화신다운 면모를 보였다. 또한 출가인임에도 모친과 누이동생에 대한 지극한 정성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천륜과 동기간 우애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중시한 인물로 유자儒者보다 더 유자다웠다. 여기에 그가 남긴 게송偈頌에서 알 수 있듯이 대도의 경지에서 천지만물과 하나가 된 우주적 기개를 지녀 모든 일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조화의 능력을 지닌 선인仙人이었다.
진정한 구도자의 삶이나 대장부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지, 아울러 참 사람의 진정한 멋은 무엇인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이를 함축해서 드러낸 게 대사의 게송이지 않을까 싶다. 세속의 명리를 초탈하여 삶을 한바탕 연극무대의 놀이마냥 아낌없이 즐기며, 아무것에도 속박을 받지 않은 대자유인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끊임없는 분별의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들을 구분 짓고 차별하는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감싸 안은 넉넉한 가슴과 여유를 보여주었다. 천지는 한마당의 놀이판(乾坤一戱場)이다. 너울너울 하늘을 향해 장삼 자락을 휘날리며 날아오르는 신선의 참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주4) 대사의 게송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모든 것을 하나로 끌어안고 이를 통합하는 무애자재한 대도의 경지와 호쾌한 기개를 느낄 수 있다. 대장부가 이 땅에서 태어나서 꿈꿀 수 있는 이상적 경지이다. 대사의 인품이 천지만물과 하나가 된 우주적 인격으로 승화되어, 천지만물을 감싸고도 남을 만큼 넓고, 걸림이 없는 넉넉한 일심一心 경지를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그 무엇에도 막힘없는 근원적 자유를 향유하면서, 천지일월과 하나 되는 참 자유를 얻는 고소한 깨침의 맛을 얻게 될 것이다.
진묵대사는 신통력이 뛰어난 도인이면서도 세상에 초연한, 그러면서도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다정다감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살가움을 지닌 이였다. 그리고 결코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는 바람과 같은 인물로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홀로 나아가는 구도자이며 천지만물과 함께 살아가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었다.
조선 중기, 남과 북에서 일어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은 민중들의 삶을 파괴시켰다. 무능한 조정은 민생을 돌보지 않았기에 민중들은 각자도생各自圖生(제각기 살아 나갈 방법을 꾀함)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디에도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거나 기댈 곳이 없어 그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전란으로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조선 민중들의 애달픈 삶을 신통한 조화력으로 남모르게 보듬어 주고, 헐벗고 가난한 민중과 어울린 진묵대사의 신비한 일화에 대한 확고한 믿음은 깊은 절망의 수렁과 나락에 빠져 허우적대던 조선 민초들의 삶의 위안처이자 출구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라도 지역에서 진묵 신앙이라 일컬어지는 신앙적 숭배 대상으로 승화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후술 ‘무자손 천년향화지지, 만경들 성모암聖母庵’ 박스 기사 참조)
진정한 대 자유인, 진묵대사의 사명
진묵대사는 미륵불의 강림을 간절히 소망하고 이를 이룬 신라 시대 진표眞表대성사와 동향인 김제 만경 출신이다. 이 지역은 백제의 미륵 하생 신앙의 발상지로 그 전통이 내려오던 곳이다. 진묵대사는 변산 월명암 낙조대落照臺에서 득도했다. 17세에 월명암에 올라 묵언 수행으로 8년 동안 주야를 떠나 정진하여 대각을 이루었던 곳이다. 변산 채석강은 일몰이 돋보이는 곳이다(불가에는 일몰을 관하는 수행법이 있다). 떨어지는 태양의 모습을 보며 돌아감(歸)의 모습, 즉 제 근원을 찾아 돌아가는 원시반본原始返本의 오묘한 섭리를 깨치게 되었을 것이다. 그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야 했었다. 일상적인 세상 논리로 보자면 깨침을 얻은 고승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서 한 세상을 초연하고 신비롭게 살다가 사바세계의 흙먼지를 툴툴 털고 미련 없이 저 세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대사의 죽음에 담긴 비화는 대사의 사명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즉 천상문명을 지상에 이식하기 위해 ‘시해선尸解仙’으로 천상에 올라간 사이에 유학자 김봉곡의 시기심과 질투로 인해 대사의 육신은 불타서 사라지고 말았다.( 후술 ‘진묵대사의 참혹한 죽음과 김봉곡’ 박스 기사 참조) 이로써 공부법의 대체를 잡는 성리대전을 익히고 천상 문명을 받아내리려던 대사의 뜻은 좌절되고, 깊은 원한을 품은 채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가게 되었다. 이후 서양은 이마두 대성사와 진묵대사의 노력으로 동양문명을 앞서게 된다(17세기 과학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이렇게 얽힌 진묵대사의 큰 원한은 우주의 주재자로서 인존으로 강세하신 증산상제님과 태모님께서 열어주신 해원解寃의 도에 의해 풀리게 된다.(주5)
이제 진묵대사의 사명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석가모니의 화신인 진묵은 당래當來의 조화 부처인 미륵불彌勒佛을 도와 선천세상과 다른 후천의 용화세계 신문명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위에 새롭게 열리는 지상낙원으로 건설해야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중생과 함께 하면서도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참 자유의 실현, 도술 조화로 이루어지는 후천 통일문명 건설의 소임을 맡고 있다. 불교의 종장으로 동서 문명을 하나로 통섭함으로써 후천의 통일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하며, 신천지 조화문명 건설의 화신이자 수호신의 역할이 그가 맡고 있는 사명인 것이다.
아울러 생명 근원에 대한 존중과 지극한 효심으로 드러난 진묵대사의 보은報恩 의식은 모든 생명이 각자 자유롭게 살며 다른 생명과 어울려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상생相生의 세상(주6)을 만들기 위한 상제님 천지 공사에 참여함으로써, 후천 개벽을 통해 온 생명을 한 가족 통일문화권으로 만드는 밑바탕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진묵대사의 소임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바로 후천 세상의 새 소식을 알리는 증산상제님과 태모 고수부님의 사략史略 편찬자 사명(도전11:244:1-5 도전간행공사 참조) 또한 그에게 부여된 중대한 소임이다. 이는 해동의 침묵이라는 도호에서 알 수 있다. 진震은 역易에서 정동 방향으로 동방인 우리나라를, 묵默은 능인적묵能仁寂默을 뜻한다. 능인은 세상의 모든 진리에 능하고 모든 만물에 어질다는 뜻이고, 적묵은 고요하고 침묵하는 가운데 깨침을 얻었다는 뜻이다. 침묵은 그저 벙어리 꿀 먹은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언어의 수동성과 능동성이 오묘하게 합치되어 있는 것이다. 침묵은 어떤 의미에서 그 자체로 완전한 세계이다. 텅빈 충만함, 말 없는 가르침을 보여주고 있다. 상제님과 태모님의 성적을 담은 [증산도 도전道典]은 진묵의 이런 기운을 받아 천지 안의 인간과 신명을 비롯한 뭇 생명들이 하나로 연결되고 소통하는 후천의 무극대도의 세계를 침묵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즉 말로 표출할 수 없는 침묵의 언어로만 나타낼 수 있는 최상의 도통 경지가 도전에 나와 있는 것으로, 대나무같이 속이 통통 비어 있는 도통군자만이 그 진리의 참 면목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새 우주 문명의 설계도이고 우주일가의 개벽문화 경전이며, 무극대도의 원전이자 무극대도 주재자인 증산상제님의 후천 세상 소식을 담고 있는 도전道典의 가치는 필설로는 능히 가늠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전은 상제님이 구현하고자 하는 무극대도에 입각해 선천의 상극세상을 넘어서 모든 생명이 새로 거듭나는 후천의 상생세상을 열어가는 개벽문화의 원천이자 보고寶庫이다.
진묵대사의 참혹한 죽음과 김봉곡
전주 서방산(西方山) 봉서사(鳳棲寺) 아래에 계실 때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김봉곡(金鳳谷)이 시기심이 많더니 하루는 진묵(震默)이 봉곡에게서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빌려 가면서 봉곡이 곧 후회하여 찾아올 줄 알고 걸어가면서 한 권씩 보고는 길가에 버려 봉서사 산문(山門) 어귀에 이르기까지 다 보고 버렸느니라. 봉곡이 책을 빌려 준 뒤에 곧 뉘우쳐 생각하기를 ‘진묵은 불법을 통한 자인데 만일 유도(儒道)까지 정통하면 대적하지 못하게 될 것이요, 또 불법이 크게 흥왕하여지고 유교는 쇠퇴하여지리라.’ 하고 급히 사람을 보내어 그 책을 도로 찾아오게 하니, 그 사람이 뒤쫓아가면서 길가에 이따금 한 권씩 버려진 책을 거두어 왔느니라. 그 뒤에 진묵이 봉곡에게 가니 봉곡이 빌려 간 책을 돌려달라고 하거늘 진묵이 ‘그 책은 쓸데없는 것이므로 다 버렸노라.’ 하니 봉곡이 크게 노하는지라. 진묵이 말하기를 ‘내가 외우리니 기록하라.’ 하고 외우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봉곡이 이로부터 더욱 시기하더니, 그 뒤에 진묵이 상좌(上佐)에게 단단히 이르기를 ‘내가 8일을 기한으로 하여 시해(尸解)로 천상에 다녀올 것이니 절대로 방문을 열지 말라.’ 하고 떠나거늘 하루는 봉곡이 봉서사로부터 서기가 하늘로 뻗친 것을 보고 ‘내가 저 기운을 받으면 진묵을 능가할 수 있으리라.’ 하며 즉시 봉서사로 올라갔느니라. 봉곡이 서기가 뻗치는 법당 앞에 당도하여 진묵을 찾으매 상좌가 나와서 ‘대사님이 출타하신 지 얼마 안 됩니다.’ 하니 봉곡이 ‘옳거니, 법당의 서기를 이 참에 받아야겠다.’ 하고 ‘법당 문을 열라.’ 하매 상좌가 ‘대사님께서 자물쇠를 가지고 가셨습니다.’ 하거늘 봉곡이 큰 소리로 호령하며 기어이 문을 부수고 들어가니 뜻밖에 진묵이 앉아 있고 그의 몸에서 서기가 뻗치더라.
봉곡이 잠시 당황하다가 문득 진묵이 시해로 어디론가 갔음을 알아차리고 ‘서기를 못 받을 바에는 차라리 돌아오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상좌에게 ‘어찌 시체를 방에 숨겨 두고 혹세무민하느냐! 중은 죽으면 화장을 해야 하느니라.’ 하며 마침내 마당에 나무를 쌓고 진묵의 시신을 화장하니 어린 상좌가 울면서 말리거늘 봉곡은 도리어 화를 내며 상좌를 내쳤느니라.
이 때 마침 진묵이 돌아와 공중에서 외쳐 말하기를 ‘너와 내가 아무 원수진 일이 없는데 어찌 이러느냐!’ 하니 상좌가 진묵의 소리를 듣고 통곡하거늘 봉곡이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니라. 듣지 말고 손가락뼈 한 마디, 수염 한 올도 남김없이 잘 태워야 하느니라.’ 하며 일일이 다 태워 버리니 진묵이 다급한 음성으로 상좌에게 ‘손톱이라도 찾아 보라.’ 하는데 봉곡이 상좌를 꼼짝도 못하게 하며 ‘손톱도 까마귀가 물고 날아갔다.’ 하는지라.
진묵이 소리쳐 말하기를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거두어 모아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고자 하였으나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여 대사(大事)를 그르치게 되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나는 이제 이 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은 대대로 호미질을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느니라.” 하시니라.(도전 4편 138장)
진묵대사는 학문과 종교, 사상의 개방성과 소통을 누구보다 중시한 대자유인으로 특히 봉곡 김동준과의 교유를 빼놓을 수 없다. 봉곡은 진묵의 죽음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1575-1661)은 자가 이식이고 호는 봉곡이다. 본관은 광산으로 고려조의 시중 문정공 태현의 후손이고, 생원 희지의 아들이다. 서인의 영수격으로 예학에 능통했던 사계 김장생(1548-1631)의 제자로서 그의 추천을 받아 의금부도사와 사헌부 감찰 등을 제수 받았다. 그는 계몽도설啓蒙圖說, 심성서언心性緖言 등의 성리학에 관한 저술을 남길 정도로 성리학적 지식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훗날 그의 묘갈명을 우암 송시열이 지었는데 여기에는 진묵대사와 교유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당시 불교를 금기한 시대적 여건을 감안하면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으나 김영곤은 [진묵선사유사발震默禪師遺事跋]에서 진묵대사와 김봉곡 사이의 교유관계를 소개한다.
[봉곡 김선생의 일기를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일옥선사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스님은 이름이 스님이지 행실은 유자였다. 슬픔을 이길 수 없다.’고 하였다. 대사가 교유한 바는 유현儒賢을 기필한 것이요, 선생이 슬퍼한 것은 대사의 유자다운 행실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김기종은 [진묵조사유적고서震默祖師遺蹟攷序]에서 “선생이 살던 곳에서 5리쯤 되는 곳에 봉서사라는 절이 있으니, 바로 진묵대사가 머물던 곳이다. 서로 왕래하며 침식을 같이 하던 사이였으니 곧 방외의 사귐이라 할 것이다”라고 하여 진묵대사와 김봉곡 사이의 교유관계를 세속을 초월한 방외우方外友라고 평가하였다. 방외우에 대해서 문헌설화에서는 두 사람의 교우관계를 우호적인 것으로 보는데 반해,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구비설화에서는 대립과 반목의 관계로 본다. 교조화된 주자학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가던 시대에서 진묵대사와 같이 능력이나 인품, 실력 면에서 월등하게 앞서 있는 인물들을 배제하는 사회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과 비판을 반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진묵대사는 봉서사에 출가하여 송광사, 위봉사, 대원사, 태고사, 월명암등의 도량을 두루 돌아다니며 운수행각과 수도생활을 하였다. [진묵조사유적고震默祖師遺蹟考]는 진묵대사가 말년에 처음으로 출가했던 봉서사로 돌아가 그곳에서 인조12년 계유년 1633년 10월 28일에 세수 72세, 법랍法臘 52세로 편안히 입적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간행)는 전혀 다른 진묵대사의 죽음에 얽힌 비화를 싣고 있다. 진묵대사의 도술 조화의 능력을 시기하고 질투한 유학자 김봉곡에 의해 참혹하게 죽었다는 것이다.([조사자 최내옥 김호선] 이 내용은 도전 4:138:9~23 내용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진묵대사를 죽게 한 장본인으로 봉곡을 지칭하는 이유는 당대 지배층의 유교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그를 비판하는 것으로, 현실사회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로서의 민중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중들은 자신들의 간절한 소망과 염원을 진묵대사의 삶에 진솔하게 투영하였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 사실보다도 오히려 더 진정한 세계와 인생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민중들은 관념적 허위의식에 사로잡힌 지식인들과는 달리 자신들의 생각과 감정을 자연스럽고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경향이 더욱 많기 때문이다. 진묵대사의 죽음에 얽힌 비화는 새 문명을 수립하는 문제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즉 도전에 언급된 것처럼 진묵이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거두어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고자 하였으나, 김봉곡의 질투로 대사를 그르치게 되어 그 한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다는 점이다. 봉곡이 살던 봉서골은 1924년에 간중제가 완공되어 수몰되었고, 그 자손 중에서 과거에 급제한 이가 극히 드물었다고 한다.
무자손 천년 향화지지無子孫 千年 香火之地, 만경들 성모암聖母庵
전라북도 만경들 화포리에 있는 나지막한 주행산舟行山에는 어머니에 대한 진묵대사의 효성을 알려주는 곳이 있다. 금계포란金鷄抱卵형의 명당자리에 위치한 이곳은 성모암聖母庵(김제시 만경면 화포리 토정마을 388번지, 화포리가 과거 불거촌佛居村임)이다. 이곳은 만경강과 서해가 만나는 하구로 해발 20m밖에 안 되는 구릉지로 흔히들 무자손 천년 향화지지無子孫 千年 香火之地라고 한다. 이는 비록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은 없어도 항상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진묵대사는 출가한 승려로서 후손이 없기 때문에 대대손손 어머니의 제사를 모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3월 초파일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자 만경면 북쪽의 유앙산 기슭에 모시면서 49제문을 지었다. 제문에는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이 절절하게 묻어나온다.
胎中十月之恩(태중시월지은) 何以報也(아이보야)
열 달 동안 태중에서 길러주신 은혜를 어찌 갚으오리까?
膝下三年之養(슬하삼년지양) 未能忘矣(미능망의)
슬하에서 삼년을 키워주신 은덕을 잊을 수 없나이다.
萬歲上更加萬歲(만세상갱가만세) 子之心猶爲嫌焉(자지심유위혐언)
만세를 사시고 다시 만세를 더 사신다 해도 자식의 마음은 그래도 모자랄 일이온데
百年內未萬百年母之壽(백년내미만백년모지수) 何其短也(하기단야)
백년도 채우지 못하시니, 어머님 수명은 어찌 그리도 짧으시옵니까?
單瓢路上行乞一僧旣云已矣(단표로상행걸일승기운이의)
표주박 한 개로 길 위에서 걸식하며 사는 이 중은 이미 그러하거니와
橫釵閨中未婚小妹寧不哀哉(횡채규중미혼소매령불애재)
비녀를 꽂고 규중에 있는 아직 시집가지 못한 누이동생은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上壇了下壇罷僧尋各房(상단료하단파승심각방)
상단 공양도 마치고 하단제사도 마치고 중들은 제각기 방으로 들어가고,
前山疊後山重魂歸何處(전산첩후산중혼귀하처)
앞산은 첩첩하고 뒷산은 겹겹이온데, 어머님의 혼백은 어디로 가셨습니까?
嗚呼哀哉(오호애재)
아! 애닯기만 합니다.
또한 이 제문에는 어머니 병구완하느라 혼기를 놓치고 혼자 사는 누이에 대한 애틋한 연민의 정도 숨김없이 토로하고 있다. 부처의 화신으로 도력이 큰 스님이면서도 이런 효성어린 인간미 넘치는 모습에서 유학자들조차도 진묵대사를 찬양하고 그 효성을 기렸던 것 같다. 진묵대사의 이런 효심어린 모습은 생명의 근원을 잊지 않는 삶의 본보기를 보여주고 있다. 출가한다는 것이 결코 인간세상을 버리는 게 아니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함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당나라 때 황벽黃壁 희운希運 선사의 고사와 대비가 된다. 선사가 눈 먼 어머니를 만나 인사만 올리고 길을 떠나자 아들이 가는 길을 따라 가다가 어머니가 물에 빠져 죽었는데도 돌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고사는 출가수행인의 용맹정진 사례로 회자되지만, 진묵대사에게 있어서는 이런 비인간적인 모습은 있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중생을 떠난 부처는 필요 없고, 중생에 대한 사랑으로 살다간 사람이 바로 부처라고 생각한 듯하다. 또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나 정이 끊을 수 없는 애욕과 집착의 굴레가 아니라, 부단한 자기 수행의 채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남의 이목을 생각하기보다는 마음이 이끄는 그대로, 세속의 연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낸 게 아닐까. 이는 수제자 안회顔回를 잃고 하늘을 보며 피 끓는 절규를 한 공자孔子의 심정과 같으리라.
이 제문을 읽은 스님들 중에는 떠나온 어머니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속세와 인연을 끊지 못하는, 또는 초월한 진묵대사의 인간적인 면모는 전란으로 심신이 피폐해지고, 그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던 민중들에게 더욱 강한 설득력과 전승력을 가진 채 지금까지 신앙적인 힘으로 면면히 이어온 게 아닌가 싶다.
이곳에 묘를 마련한 진묵대사는 스스로 붓을 들어 현판에 ‘여기 이 묘는 만경현 불거촌에서 나서 출가 사문이 된 진묵 일옥의 어머니를 모셨는 바, 누구든지 풍년을 바라거나 질병 낫기를 바라거든 이 묘를 잘 받들지니라. 만일 정성껏 받든 이가 영험을 못 받았거든 이 진묵이 대신 결초보은하리라’고 적었다고 한다. 이 현판은 소실되고 없지만 성모님의 묘를 중심으로 세워진 성모암, 조앙사祖仰寺, 진묵사震默寺에서는 진묵대사와 모친의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드린다고 한다(성모의 다례일 음 3월 8일). 또한 이 무덤을 찾아 성묘하고 제사를 드리면 집안에 재앙이 없고 풍년이 든다고 하여 매년 수백 명이 찾아온다 하니 결국 자손이 없어도 향화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1. 곡차란 말 그대로 곡식으로 만든 차이다. 이 곡차의 유래는 바로 진묵대사에서부터 시작되어 '술'을 술이라고 부르지 않고 '곡차'라고 불렀다. 대사에 의하면 마셔서 정신이 몽롱하도록 '취하게 하면 술'이요, 마셔서 정신이 '맑아지게 하면 차'라고 했다. 대사는 주량이 엄청나서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정신이 맑아진다고 한다. 술은 곡식으로 빚는 것이니, 술을 곡차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이다. 굳이 둘로 나누는 분별, 언어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아집과 편견을 깨기 위해 역설적으로 술과 곡차를 구분한 것이다. 개념적 사유작용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관계를 대사가 얼마나 숙고했는가를 헤아려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술은 본래 제의祭儀와 관련이 있다. 천지신명과 교류를 트는 매개물이다. 제의를 마치고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사람들은 공동체의 친목과 화합을 다지는 새로운 계기와 발판을 이룬다. 이후 술은 인간의 삶에 다양한 의미를 던져준다. 공동체 사회의 전통의례를 집행함에 있어 중요한 음식물이었다. 또한 모임에서 흥을 돋구어주는 고흥물高興物이자 개인 삶의 근심을 잊게 해주는 양약인 망우물忘憂物이었다. 더욱이 술은 온종일 고단한 세상사에 지친 이들의 육체적인 고통뿐 아니라 심리적 고단함마저도 덜어주는 효능을 발휘하는 원기회복제이기도 하다. 대사는 술을 아주 좋아하였다. 왜 술을 그토록 좋아하였을까?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술 마시는 것도 도를 닦는 수행의 방편일 수 있다. 천지만물과 하나가 되는 신묘한 경지는 술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주2. 진묵대사에 대한 문헌 기록은 초의의 [진묵조사유적고]가 유일하다. 다른 기록들은 이 기록에 대한 변주에 불과하다. 이 발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들은 불자가 아니라 유학자이다. 진묵대사에 대한 자료를 오랫동안 수집하여 초의선사에게 집필을 의뢰한 이는 남원 출신 유학자 은고隱皐 김기종金箕鐘이다. 그 아들인 김영곤金永坤은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제산霽山 운고雲皐 스님에게 발문을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직접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김영곤은 발문에서 자신의 부친이 진묵대사를 존경하고 진묵대사의 삶의 발자취를 세상에 전하려고 한 까닭은 진묵대사의 유자로서의 삶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당시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를 탄압하고, 주자학의 절대성만을 강조하던 시대에 불교의 승려였던 진묵대사를 존경하고 흠모하여 후대에까지 그 발자취를 남기고자 한 것은 특이한 일이라 하겠다. 여하튼 진묵대사의 삶에 대해서는 한 편의 제문과 두 편의 게송만 있을 뿐이고, 그것조차도 남의 입과 손을 빌려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대부분 구비설화나 문헌설화의 형식으로 전해진다.
주3. 명리승 비판-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이끌고 나섰던 서산과 사명대사를 비판한 것이다. 그들이 호국불교의 이름으로 현실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국가의 안위와 민중의 고난을 걱정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이지만, 유교와의 마찰을 피하면서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여 새로운 중흥을 꾀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나라를 위해 진리를 팔았다고 볼 수 있는 대목으로, 대사의 눈에는 조선의 순진무구한 백성이나 왜군들이 둘이 아니었다. 힘없는 조선의 백성뿐 아니라 조선 백성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약탈하는 왜군조차도 한없이 불쌍한 중생으로 본다는 사실에서 피아를 가리지 않고 그들을 모두 구제하려는 자비로운 삶의 극치를 보여준다. 호국불교라는 명목을 내세우고 왜구를 무력으로 맞대응하여 폭력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도리어 민중들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가 그들의 고단한 삶을 위무하고 치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하지만 [진묵조사유적고]를 보면 입적 당시 법통에 대해 묻는 제자들에게 당대 명리승인 휴정 서산대사에게 법맥을 붙이라고 하였다.
주4. 선은 상고시대 屳으로 기술했다(人+山). 설문해자에서 屳을 해석하면서 사람이 산 위에 있는 모양 (人在山上皃(貌))이라고 풀이했다. 산은 만물을 생성하게 하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높은 산의 정상은 천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선인의 상승적, 초월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선의 개념이 산악숭배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선仙이란 본디 긴 소맷자락을 드날리며 춤추는 모습(僊 춤출 선, 선인 선)에서 유래한 것으로 한나라 이전에는 선僊으로 썼다. 선僊은 장생불사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뜻하고 춤추는 옷소매가 바람에 펄럭인다는 뜻이다.
주5. (도전 6편 103장)
후천선경 건설의 대문명신, 진묵대사 귀국 공사
1기유년 정월 초이튿날 대흥리에서 제수를 준비하여 성대하게 차리시고 2성도들로 하여금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고축(告祝)하게 하시니 이러하니라.
3 祝 文 축 문
維歲次己酉正月二日昭告 유세차기유정월이일소고
化被草木賴及萬方 화피초목뢰급만방
魂返本國勿施睚眦伏祝 혼반본국물시애자복축
南無阿彌陀佛 나무아미타불
축문
기유년 정월 이일에 밝게 고하노라.
덕화는 초목에 이르기까지 입지 않음이 없고 이로움은 온 누리에 미치었도다.
혼(魂)이 본국에 되돌아오니 조금도 원망치 말기를 엎드려 축원하노라.
나무아미타불
4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묵이 봉곡에게 죽음을 당하고 동방의 도통신(道統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가 서양의 문명을 열었나니 5이제 다시 진묵을 동토로 불러와서 선경을 건설하는 데 역사하게 하리라.” 하시니라.
6또 말씀하시기를 “내 세상에 진묵의 소임이 막중하니 장차 천하 사람들의 공경을 받으리라.” 하시고 진묵대사 초혼(招魂) 공사를 처결하시니라.
7이 때 여러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묵의 혼이 도통신을 데리고 넘어온다.” 하시며 하늘을 바라보시는데 8구름이 무수히 많은 사람 모양을 이루어 하늘 서쪽에서 동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완연하더라.
주6. 일반적으로 상생을 단순히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공생共生의 뜻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상생은 단지 공생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된 선천의 상극세상을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느냐에 초점이 있다. 인류의 모든 비극과 고통은 바로 선천세상의 상극질서에서 비롯된다. 상생은 배은과 원한으로 사무친 상극의 굴레를 완전히 털어버리는 데서 비로소 발현될 수 있다. 진정한 상생은 인간의 문명질서를 포함한 새 우주질서가 열리는 데서 발현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극시대에서는 상생의 삶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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