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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재난에서 살아남기

사진으로보는역사 본문

한민족의 역사

사진으로보는역사

전종수 2024. 1. 3. 00:01

8.15 광복光復

서울에서 10여 일을 머무르시며 여러 가지 공사를 행하시고 경복궁 앞에 벽력표(霹靂表)를 묻으신 뒤에 성도들에게 이르시기를 “모두 흩어져 돌아가라. 10년 뒤에 다시 만나리라. 10년도 10년이요, 20년도 10년이요, 30년도 10년이니라.” 하시거늘 한 성도가 “40년은 10년이 아닙니까?” 하고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40년도 10년이야 되지만 넘지는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증산도 道典 5:132:1~3)

 

갑작스럽게 찾아온 광복

드디어 광복이 되었다. 길고 길었던 일제의 간악한 통치는 신형 무기 원자탄 세례로 순식간에 종식되었다. 상제님 말씀대로 1906년 병오년부터 40년 만에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가냘픈 약소국 조선의 운명은 순탄치 않게 진행된다. 대일 항전에서 뚜렷한 전과戰果 없이 미국에 의해 광복을 맞이했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일명 ‘독수리 작전’으로 불렸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미국의 공동 한반도 진공 작전은 일본의 갑작스런 항복으로 채 실행되지도 못하고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들은 김구 주석은 “내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 애를 써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백범일지)고 기록하여 당시의 낙담했던 분위기를 전하였다.

여기에 더해 독립을 위해 노력해 왔던 국내외 여러 단체 사이에 주도권 다툼이 생기고, 미국과 소련이 거의 동시에 한반도에 진주하여 각기 다른 체제의 나라를 만들려고 시도하면서 우리 민족에게는 분단의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이는 대세로 보면 상제님의 천지공사 프로그램에 따라 한반도 주변의 4대 강국이 두 패로 나뉘어 대결하는 상씨름판의 틀이 형성되는 과정이었다.

건국建國 움직임과 미 군정軍政 실시

국내에서 가장 먼저 건국을 준비한 것은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1944년 8월에 비밀결사로 조직된 ‘건국동맹’이었다. 중도 우파 민족주의자와 중도 좌파가 연합된 이 단체는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만들고 국내 치안을 담당하기 위해 치안대를 설치하고,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만들었다. 이후 좌파의 적극적 개입으로 우파가 탈퇴하자 건준은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약칭 ‘인공’)을 선포했다. 우파가 빠진 인공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미국에 망명 중인 70세의 이승만李承晩을 주석으로, 부주석에 여운형呂運亨, 국무총리에 온건 좌파인 허헌許憲을 추대했다. 그러나 인공의 실권은 이미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46세의 박헌영朴憲永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그런데 인공이 선포되던 9월 6일 미군이 남한에 진주하면서 사령관 하지 중장은 즉각 ‘군정軍政’을 선포했다. 인공의 활동은 중단되었다. 한편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백관수, 김병로 등 일본이나 미국에서 공부한 우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민주당’(약칭 ‘한민당’)이 만들어졌다. 한민당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려 했으나 미국은 민족주의 색채가 강한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 주석인 김구의 입국도 개인 자격으로만 허용했다.

미소공동위원회 결렬과 단독정부 움직임

여러 정당이 세워져 난립하며 새로운 국가 수립을 준비하던 상황에서 1945년 말 모스크바에서 실망스런 소식이 들려왔다. 미국·소련·영국의 외상들이 모여 삼상회의(12. 28)를 열고 ‘한국 문제에 대한 4개 항의 결의서’를 결정했다. 이 안은 먼저 ‘미소공동위원회와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여기서 조선의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해 미국·영국·소련·중국이 최고 5년을 기한으로 하는 신탁통치 실시를 논의한다’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했다.

한국인들은 감정상 거세게 반발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승만, 김구 등의 우익 세력은 대대적인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나섰다. 반면 공산당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1946년부터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아서게 된다. 1946년부터 1947년은 이 문제로 좌우가 격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후 미소공동위원회(1946. 3, 1947. 5)는 협의의 대상이 될 정당과 사회단체 선정을 둘러싸고 미·소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자, 결국 결렬되고 만다.

정부 수립이 늦어지자 일부 우익 세력은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특히 북한에서 김일성의 지배권이 빠른 속도로 확립되고 있어서 이에 대응하는 남한에서의 우익 정부 수립이 설득력을 얻기 시작했다. 드디어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독자적으로 ‘정읍 선언’을 발표하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강하게 주장했다.

무산된 좌우합작운동, 그리고 유엔으로

남북 분단을 우려한 인사들은 남북한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좌우합작 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김규식을 대표로 하는 5명의 우익과 여운형을 대표로 하는 5명의 좌익 인사들은 1946년 7월 하순 ‘좌우합작위원회’를 구성하고 이해 10월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다.

중도정부를 지향하는 ‘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가장 반대한 측은 공산당과 한민당이었다. 이에 미군정은 1946년 12월 12일 좌우합작위원회와 한민당계를 주축으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자 여운형의 중도좌파가 입법기구 조직에 반대하여 합작위원회에서 탈퇴했다. 미군정은 1947년 2월 5일 민정장관에 중도우파의 안재홍을 임명하고, 5월 17일 남조선과도정부를 세웠다. 미소공동위원회도 이해 5월에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나 동구권이 소련의 입김에 의해 도미노식으로 공산화가 시작되자 미국과 소련 간에 냉전이 시작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미국의 정책이 강경책으로 선회하자 좌우합작 운동은 크게 힘을 받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United Nations)으로 끌고 갔다. 이에 따라 미소위원회는 완전히 결렬되고 좌우합작위원회도 1947년 12월 해체되었다.

국제연합은 이보다 앞서 1947년 11월 14일 유엔감시하의 남북 총선거를 통한 한국통일안을 가결했다. 그러나 인구가 남한보다 적은 북한이 총선거에 불리하다고 생각하여 소련이 이를 반대하자, 1948년 유엔소총회는 남한만의 선거를 치르기로 결의했다. 남북 분단이 국제사회에서 기정사실화된 것이다. 남북 분단은 단순히 이념의 대립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상제님의 세운공사에 따라 오선위기로 펼쳐지는 한반도 주위의 국제 정세에 따른 결과이다.